이상한 정상가족, 김희경

이상한 정상가족

김희경/ 동아시아


가족 안에서 가장 약한 사람의 아주 작은 권리조차 보장되지 않는다면 더 큰 세계에서 발전하려는 노력도 헛된 일이 될 것이다.
p.13

그러나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아동학대는 극히 비정상적인 사람들의 고의적 폭력이라기보다 보통 사람들의 우발적 체벌이 통제력을 잃고 치달은 결과라는 것이 그간 숱한 분석과 연구를 통해 확인된 사실이다.
p.26

나는 언제든 너의 몸에 손댈 수 있다는 가르침, 과거 여성에 대한 폭력도 같은 메시지를 깔고 있었다. 체벌을 비롯하여 친밀한 관계에 있는 타인에 대한 반복적 폭력은 모두 같은 메시지를 보낸다. 나는 언제든 당신을 통제할 수 있다는 권위주의적 메시지, 당신이 존재할 권리를 결정하는 사람은 당신이 아니라때리는 사람인 나라는 주장, 그렇게 힘으로 상대를 침묵시키고 상대의 목소리를 부정하고 때리는 사람의 목소리를 상대 안에 심으려 하는 시도다.
p.30

부모의 자녀에 대한 권리는 부모의 자유권이라기보다 자녀의 보호를 위해 부여되는 기본권으로 권리보다는 의무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가족 내에서 부모의 양육방식은 치외법권적 '천륜'의 영역이 아니며 인권 보호를 위한 국가의 제재 대상이어야 한다. 비대한 국가를 선호해서가 아니다. 공공의 개입이 닫힌 방문 안에까지 이루어질 때에만 비로소 숨을 쉴 수 있고 자유로워지는 약자들이 가족 안에 있기 때문이다.
p.57

친권은 부모가 자녀를 보호하고 가르칠 '의무'지 자녀에 대한 처분 '권리'가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친권'을 지나치게 넓게 해석한다. 법률상의 친권은 '자녀를 보호하고 교양할 의무'에 방점이 찍히는 것이고 친권자인 부모가 이러한 의무를 소홀히 할 경우 친권은 박탈될 수 있는데도 말이다.
p.105

해방과 한국전쟁, 급격한 산업화 등으로 사회가 극심하게 변화하는 와중에 개인을 보호하는 유일한 안전망은 혈연 및 직계가족뿐이었다. 가족이 친밀한 사적 생활영역이라기보다 거의 공적 영역을 뒷받침하는 준 공적 성격을 갖게 되어버렸다.
p. 182

부의 세습을 당연시하는 요즘 사회분위기에서 여유로운 부모를 둔 청년들은 부모의 후광에 '우쭐한' 감정을 느끼기도 하지만 가족 내 부모와 자녀의 구도에서는 결국 부모를 만족시킬 수 없는 '민망한' 자식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들은 '자부심'과 '주눅'이라는 이중적 감정 사이를 오간다. 그렇게 중산층 가족 내에서 부모 자녀 관계는 도구적 의존성이 강화되고 가족주의는 더 견고해져 간다.
p.187

부모의 체벌금지를 비롯한 모든 종류의 체벌을 금지하는 법의 목적은 단순하다. 명백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매우 선명한 메시지를 내보내는 것.
...
어른의 책무는 아이들에게 폭력이나 협박, 위협에 기대지 않고도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음을 가르치는 것이며, 정부의 책무는 비폭력적으로 아이를 키우는 게 가능한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p.217

여러 정책 중 대규모 예산이 투입되는 대형 정책은 아니지만 눈에 띈 것은 '육아상담소'를 중심으로 한 부모교육이었다. 새로 부모가 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어린이 발달의 과정, 양육 방법, 부모의 책임, 긍정적 훈육방법 등을 가르치는 교육이다. 법으로 부모의 체벌을 금지한 해인 1979년부터 아이 출산 전 10시간, 출산 후 10시간씩 부모교육 참석을 위한 직장 유급휴가제도 도입했다.
p.230

미셸 푸코는 "가족 자체자 공과 사의 혼혈아이며 공과 사의 경계는 유동적으로 재구성된다"라고 말했다. 앞서 살펴본 스웨덴이 '공'을 늘려 '사'를 보존한 경우라 할 것이다. 우리는? '공'이 모자라 '사'가 너무 많은 일을 감당하느라 그 안의 모두가 불행해진 상태라고나 할까.
p.237

공감의 감수성을 높이려는 노력은 물론 필요하지만 이를 개인의 도덕적 과제, 감성의 영역으로만 남겨두어선 안 된다. 우리'의 폭을 넓히려는 교육이 공교육에 제도적으로 퐘되어야 하고, <차별금지법>, <이주아동권리보장기본법>을 제정해야 한다. 그게 우리를 같이 살아가게 해주는 공감의 제도화다. 역지사지하고 공감하는 능력보다 사적 관계에선 예의, 공적 관계에선 정책과 제도가 우리의 공존을 가능하게 해주는, 더 인간적인 장치다.
p.257

인류학자 김현경은 <사람, 장소, 환대>에서 이 공공성을 '절대적 환대'라는 말로 아름답게 표현했다.
그가 설명한 절대적 환대, 즉 공공성의 창출은 "타자의 영토에 유폐되어 자신의 존재를 부인당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치는 일, 그들을 인지하고 인정하는 일, 그들에게 '절대적'으로 자리를 주는 일, 즉 무차별적이고 무조건적으로 사회 안에 빼앗길 수 없는 자리/장소를 마련해주는 일"이다. 그는 뒤르켐의 말을 인용하여 "공공성이 강화될수록 사생활의 자유는 오히려 커진다"라고 설명했다.
p.263-264

내 혈연이 아니더라도 세대를 이어 인류가 계속 존재하리라는 기대가 사라진다면, 개인의 삶은 유한해도 나보다 더 크고 지속되는 전체에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이 사라진다면, 그 모든 추구와 삶의 의미도 빛을 잃는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모두 미래의 낯선 이들에게 의존하고 있다. 존재의 의미를 다음 세대에, 아이들에게 빚지고 있다.
p.267


=

5년이 좀 못 되게 기자 생활, 주로 사회부 소속으로 취재를 하고 기사를 썼다. 그 시간들을 구획하는 기준점은 몇 가지 커다란 사건과 시리즈 기사들이다.

교육부 출입의 마지막 장은 아동학대 사태가 장식했다. 학교에 오래 나오지 않았던 아이들 다수가 제 부모들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들이 속속들이 드러났다. 방임, 폭력, 살해, 시체유기. 2016년 봄, 그 해의 가정의 달은 그래서 참담했다.

그때 나는 부모가 된다는 것과, 가족에 대해서 깊이 생각했다. 같은해 여름에는 다시 경찰팀으로 돌아와서 가정폭력에 대한 시리즈 기사를 썼다. 덕분에 봄에 하던 고민을 더 큰 틀에서 이어갈 수 있었다.

나는 '가족'에 대한 우리 사회의 통념이 뿌리부터 뒤틀려있다는 생각을 했다. 가정 역시 사회를 닮아서 그 울타리 안에서 가장 취약한 존재들이 가장 위험한 환경에 놓여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모성애, 자식 사랑 같은 것들이 결코 본능이 아니라는 확신도 하게 됐다.

인간은 역시 불완전한 존재였다. 우리는 스스로의 미숙함을 인정해야만 한다. 처음이라 모르는 다른 모든 일을 배우듯, 부모의 역할도 배워야 한다. 하지 않아야 할 것과, 해도 되는 것의 명백한 구분을 제도가 도와야 한다.

이 책은 왜 우리가 이토록 이상한 '정상 가족'에 대한 맹신 속에 갇혀 살아가는지, 거기서 파생되는 문제들은 무엇인지, 그걸 어떻게 해결해야 할 지에 대해 쉽고 명확하게 풀어내고 있다. 구구절절 맞는 얘기라서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읽었다. 스웨덴과의 사회적 시차가 새삼 놀랍기도 했다. 부모가 될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다.


https://news.v.daum.net/v/20160830040100652
https://news.v.daum.net/v/20160830040101653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해피투게더 (1997)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와타나베 이타루

인턴 (2015)

2015년 11월 4일 수요일 10개 일간지 1면

사람, 장소, 환대, 김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