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쪽의 풍경은 환한가, 심보선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


심보선 / 문학동네



그러나 나는 글을 쓰면서 - 그것이 시건 혹은 논문이건 - 깨닫게 되었다. 내가 선택하고 빠져드는 대상은 단순히 주제가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인간들의 탄식, 좌절, 환호성, 기쁨, 경탄이 어려 있는 세계라는 것을. 그리하여 내가 이 세계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그 세계를 부각시키는 것이고, 그 세계와 연루된다는 것이고, 그 세계에 참여한다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아버지와 베버가 말하듯 삶과 글쓰기는 고독한 작업으로 시작하여 고독한 작업으로 돌아올지 모른다. 그러나 그 출발과 회귀 사이에는 고독한 여정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나의 몸과 영혼을 뜨겁게 하고, 내 가슴 속에서 말을 들끓게 하고, 나의 손발을 움직이게 하는 힘은 단순히 주제의 흥미로움이 아니라 바로 동시대인들의 삶이고 그 삶에 섞여드는 사물들의 동시대적 운동이다.
p.08-09

그렇다. 결국 모든 것은 영혼의 문제여야 한다.
...
영혼은 행복의 문제와 연결된다. 그러나 영혼은 행복을 귀중한 선물처럼 안절부절 다루지 않는다. 영혼은 불행에게도 손을 건넨다. 그리하여 영혼은 불행과 행복의 차이를 지우고 그 둘을 동등하게 만든다.
...
영혼은 의미와 무의미를 같은 장소로 데려온다. 영혼은 '행복하지만 삶의 의미에 무지한 아이'와 '불행하지만 삶의 의미에 도통한 노인'을 합체시켜서 새로운 인간을 탄생시킨다. 영혼은 오늘 속으로 과거와 미래를 수렴시켜서 새로운 시간을 창조한다. 영혼 속에서 인간은 언제나 새로워진다.
...
영혼은 어쩌면 허튼소리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허튼소리다. 영혼은 불가능성에 대한 가장 경이로운 역설이요, 가장 아름다운 역설이다. 이 수수께기 같은 영혼 때문에 나는 웃다가 울고 울다가 웃는다. 영혼 때문에 나는 시를 쓰고 시를 산다.
p.22

일상생활에서의 '깊이 생각함'일나, 느긋하게 산책을 할 때라면 한 송이 꽃을 보고도 쉽게 느낄 공통성의 기초를, 생존의 흐름에 내몰리고 휩쓸릴 때에도 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결국 악이란 '망각을 선택함'이고 지옥이란 거듭된 망각 끝에 다다르는 종착지의 이름이다. 장담컨대 그 종착지인 지옥은 끔찍하기는커녕 너무나 평범한 세계의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할 것이다.
p.64-65

하지만 사라진다는 것은 어찌됐건 슬픈 일이고 사라질 것을 예감하면서 애착한다는 것은 더 슬픈 일이다.
p.119

나는 시를 쓰는 행위를 '내가 쓸 수 없는 것'을 쓰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
'쓰는 나'는 쓸 수 없는 것을 씀으로써 '인격적인 나'를 소멸시킨다. 시를 쓰는 행위는 둘로 나뉜 나를 드러낸다. 분열이라기보다는 균열의 방식으로 그렇게 나뉜 나를 보여준다.
...
쓸 수 없는 것을 씀으로써, 나는 계속해서 나 아닌 존재로 거듭난다. 따라서 과거는 수많은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는 타자들로 가득한 전생이 되는 것이다.
p.130-131

시를 쓸 때, 나는 '타자'가 됨으로써, 내가 쓸 수 없는 것을 쓴다. 혹은 내가 쓸 수 없는 것을 씀으로써 타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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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시는 "침묵하고 있던 돌이 드디어 말을 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발견하고 발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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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세계를 예술적 탁월함이나 미적 완성도로 규정하려는 모든 시도는 실패하게 돼 있다. 왜냐하면 그 세계는 예측 불가능하며 언제나 "아직 끝나지 않았어" "이게 전부가 아니야"라는 잉여의 감각 속에서, 예감 속에서, 텅 빈 침묵 같지만 사실은 넘쳐나는 수다의 말로, 서늘한 금속 같지만 사실은 뜨겁게 달아오른 칼날의 이미지로 출몰했다 사라지기 때문이다.
p.134-135


나는 언젠가 "시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수학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p.167


또 사람들은 시가 숭고한 진리를 표현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의 진리란 세상에 대한 견해가 아니다. 그것은 시라는 특이한 말의 얼개가 설핏 들춰내는 삶의 형상이다. 그렇기에 시는 진리보다 행복에 더 가까운 것이다.
나는 시라는 말 만들기 놀이를 통해 주어진 삶 말고 또다른 삶을 제작해왔다. 시 때문에 나는 두 개의 삶을 살게 됐다.
p.169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우리 세대의 사람들, 우리 시대의 시 쓰는 이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상실의 상실'일 수 있겠다.
...
서러움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원통하고 슬프다'라는 정의가 나온다. 하지만 이 정의는 부족하다. 나는 서러움을 '상실감에 머물면서 그것을 만끽하는 것'이라고 정의해본다.
p.178-179

잊지 말자고 말하는 사람이 외롭다면 잊히는 살마은 그보다 백배 더 외로울 것이다. 외로움이란 존재가 희미해질 때 느끼는 감정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기억의 장소를 필요로 한다. 자신의 일부가 사라진 존재의 나머지 부분까지 사라지게 내버려둘 순 없는 것이다.
p.221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고 안도하는 순간, 망각은 거스를 수 없는 물리법칙처럼 작동하여 우리가 그토록 싸웠던 무책임과 무자비함을 어느새 승자의 위치에 되돌려놓기 때문이다. 기억의 힘을 잃은 세상이야말로 우리가 또다시 패배했다는 사실조차 잊게 만드는 끔찍하도록 평화로운 지옥이기 때문이다.
p.263

글이란 불확실성의 극치이다. 글이란 머릿속 문장들의 빅데이터에서 하나씩 골라 옮겨 쓰는 것이 아니다. 내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준비된 문장도 없다. 오로지 무만 존재한다. 모든 문장은 오로지 쓰기라는 활동을 통해서만 무로부터 떠올라 형상을 갖게 된다. 나는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알지 못한다. 그러니 문장들을 이어 글을 쓰고, 글들을 모아 책을 엮는 일은 내게 늘 기적처럼 느껴진다.
p.325

나에게는 세 가지 수수께끼가 있다. 영혼이라는 수수께끼, 예술이라는 수수께끼, 공동체라는 수수께끼이다. 이 수수께끼는 내 시에도 나오고 논문에도 나오고 산문에도 등장한다. 알려 해도 알 수 없지만 알고 싶은 마음을 그칠 수 없는 인생의 화두들이다. 이 화두들을 붙잡고 죽을 때까지 쓰고 싶다. 나는 여전히 기적을 소망하고 있는 것이다.
p.327


=

작가의 좌우뇌가 고루 명석해서 내 머리와 가슴까지 덩달아 개운해진다.
논문도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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