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 한강

소년이 온다
한강/창비



혼은 자기 몸 곁에 얼마나 오래 머물러 있을까. 
그게 무슨 날개같이 파닥이기도 할까. 촛불의 가장자릴 흔들리게 할까. 
p.45

치욕스러운 데가 있다, 먹는다는 것엔. 익숙한 치욕 속에서 그녀는 죽은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배가 고프지 않을 것이다, 삶이 없으니까. 그러나 그녀에게는 삶이 있었고 배가 고팠다. 지난 오년 동안 끈질기게 그녀를 괴롭혀온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허기를 느끼며 음식 앞에서 입맛이 도는 것.
p.85

흥미로운 사실은, 군중을 이루는 개개인의 도덕적 수준과 별개로 특정한 윤리적 파동이 현장에서 발생된다는 것이다. 어떤 군중은 상점의 약탈과 살인, 강간을 서슴지 않으며, 어떤 군중은 개인이었다면 다다르기 어려웠을 이타성과 용기를 획득한다. 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숭고했다기보다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지닌 숭고함이 군중의 힘을 빌려 발현된 것이며, 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야만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야만이 군중의 힘을 빌려 극대화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 다음 문단은 검열 때문에 온전히 책에 실리지 못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p.95

군인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상한 건, 그들의 힘만큼이나 강렬한 무엇인가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p.114

모든 사람이 기적처럼 자신의 껍데기 밖으로 걸어나와 연한 맨살을 맞댄 것 같던 그 순간들 사이로,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이, 부서져 피 흘렸던 그 심장이 다시 온전해져 맥박 치는 걸 느꼈습니다. 나를 사로잡은 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선생은 압니까, 자신이 완전하게 깨끗하고 선한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이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 양심이라는 눈부시게 깨끗한 보석이 내 이마에 들어와 박힌 것 같은 순간의 광휘를. 
p.115-116

그러니까 형, 영혼이란 건 아무것도 아닌 건가. 
아니, 그건 무슨 유리 같은 건가. 
유리는 투명하고 깨지기 쉽지. 그게 유리의 본성이지. 그러니까 유리로 만든 물건은 조심해서 다뤄야 하는 거지. 금이 가거나 부서지면 못쓰게 되니까, 버려야 하니까. 
예전에 우린 깨지지 않은 유리를 갖고 있었지. 그게 유린지 뭔지 확인도 안해본, 단단하고 투명한 진짜였지. 그러니까 우린, 부서지면서 우리가 영혼을 갖고 있었단 걸 보여준 거지. 진짜 유리로 만들어진 인간이었단 걸 증명한 거야. 
p.130

오직 사랑으로 우릴 지켜본다는 존재를 믿을 수 없었어. 
주기도문조차 끝까지 소리 내 읽을 수 없었어. 
내가 그들의 죄를 사한 것같이 아버지가 내 죄를 사할 거라니.
난 아무거도 사하지 않고 사함 받지 않아. 
p.151

생시에 가까워질수록 꿈은 그렇게 덜 잔혹해진다. 잠은 더 얇아진다. 습자지처럼 얇아져 바스락거리다 마침내 깨어난다. 악몽 따위는 아무거도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기억들이 조용히 당신의 머리맡에서 기다리고 있다.
p.161


=

겪어보지 않은 폭력의 광기와, 그로 인해 스며든 처절한 아픔을 이렇게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다니. 이런 감수성은 정말이지 천부적인 걸까. 직접 겪은 것조차 이렇게 담아내기는 힘들 것 같다.
부디 이 소설이 같고도 다른 상처를 떠안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따듯한 치유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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