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사전(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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舟を編む(2013) 감독: 이시이 유야 출연: 마츠다 류헤이, 미야자키 아오이, 오다기리 죠 "서쪽을 향해 섰을때 북쪽이 오른쪽입니다." "말의 의미를 알고 싶다는 건 누군가의 생각이나 감정을 정확히 알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과 이어지고 싶다는 소망은 아닐까요?" "사랑: 어떤 사람을 좋아하게 되어 자나깨나 그 사람 생각이 떠나지 않고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지 않게 되며 몸부림치고 싶어지는 마음의 상태. 이루어지면 하늘에라도 오를 듯한 기분이 된다." "'감사' 라는 단어 이상의 단어는 없는지 저 세상이 있다면 거기서 용례 채집을 해 볼 생각입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나, 4학년 때였나. 책에 푹 빠져 지내던 나는 갓 생긴 학교 도서관이 문을 닫을 때까지 집에 가지 않았다. 글의 세계는, 그리고 말의 세계는 무궁무진했다. 읽어도 읽어도 끝이 없었고 언제나 새로운 말들이 불시에 튀어나왔다. 사전을 끼고 책을 읽었다. 그러다 나는 사전을 읽기 시작했었다. 'ㄷ'의 중간까지 읽었던 걸로 기억한다. 어쩌다 사전을 읽을 생각을 했는지 어떤식으로든 좋은 영향을 받았으리란 생각에 지금 돌이켜봐도 스스로 기특한 기분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나는 자라나며 기계 문명의 혜택을 지나치게 받게 됐고 종이사전으로부터는 점점 멀어져갔다. 공부를 하겠답시고 책상머리에 앉은 중학교 때부터 전자사전이 필수품이 됐고 대학에 진학해서는 휴대폰의 사전 기능에 자꾸만 손이 갔다. 영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조금은 부끄러웠다. 한때 사전에 남다른 애착을 가졌던 사람으로서 사전은 누가, 어떻게 만드는가에 대해선 진지한 고민을 해보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행복한 사전'은 사전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대답을 길고 느린 호흡으로 풀어낸다. 경이에 가까운 그 작업은 부족

윤일병 잘 가요

“네가 한알의 밀알 되기를… 사랑한다, 아들아” “4월 5일 네가 전화했을 때. ‘엄마 (면회) 오지 마. 4월은 안돼’ 했을 때. 미친 척하고 부대로 찾아갔더라면…. 면회가 안 된다는데 찾아가면 혹시 너에게 불이익이 있을까봐 엄마는 그저 주저앉고 말았단다. ○○야, 정말 미안하다. 바보 같은 엄마를 용서해라.” 육군 28사단에서 선임병들의 가혹행위로 숨진 윤모(20) 일병의 어머니 안모(58)씨가 8일 저녁 서울 용산구 국방부 앞에 갔다. 군인권센터가 주최한 ‘윤 일병과 또다른 모든 윤 일병들을 위한 추모제’에 참석해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었다. 아들의 전화를 받고도 혹독한 상황을 눈치채지 못했던, 혹시 아들이 불편할까봐 꾹 참고 면회를 포기했던 엄마는 한맺힌 눈물을 흘렸다. 안씨는 오후 9시20분 한손에 손수건을 들고 추모제 무대에 섰다. 흐느끼며 편지를 읽어내려갔다. “보고 싶고 또 보고 싶은 사랑하는 아들. 네가 하나님 품으로 떠난 지 벌써 넉 달이 지나고 있구나. 엄마는 그 시간을 어떻게 살아냈는지. 제발 꿈이었다면….” 아들의 ‘사고’를 접한 날은 이렇게 회고했다. “4월 6일 네가 의식을 잃고 이송되고 있다는 비보를 듣고도 병원으로 달려가는 차 안에서 이런 생각을 했단다. 훈련소 퇴소 후 한번도 만나지 못한 네가 얼마나 가족이 보고 싶었으면, 하나님이 이렇게라도 네 얼굴을 보여주시려고 한 게 아닌가.” 한걸음에 달려간 병원 응급실에는 “너무나도 참혹한 모습으로 힘없이 누운” 아들이 있었다. 그 모습에 안씨는 “하늘이 무너지고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고 했다. 하루하루 고통과 피눈물로 살아간다는 어머니의 고백이 이어지자 다른 희생자 유족과 시민들도 울음을 터뜨렸다. 안씨는 “늘 부족했던 부모에게 불평 한번 않고, 장학금을 받고, 방학이면 개학 하루 전까지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부모님 용돈까지 챙겨주던 속 깊은 아들”이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편지는 이렇게 마무리됐다. “네가 한 알의 밀알로 이 땅에 썩어져 널 통해

강신주의 감정수업, 강신주

아직도 사랑하고 있기에, 우리는 잔인해질 수도 있다. 그래서일까, 스피노자도 잔학함과 잔인함 속에는 사랑의 감정이 깔려 있다는 것에 주목했던 것이다. p.172 = 강신주가 자신의 문장으로 직접 쓴 부분중에 유일하게 맘에 담고 싶었던 건 저 두문장 뿐이었다. 500페이지가 넘는 책이 이렇게 내게 홀대받기도 쉽지 않다.  전반적으로 오만방자하다.  작가는 스피노자의 입을 빌려 48가지 감정을 정의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정의와 설명, 감정에 대한 태도, 그 감정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자들에 대한 분석이 철학자의 열린 사고라고는 믿기 힘들만큼 편협하고 고압적이었다. 작품에 대한 깊이있는 통찰도 제시하지 못했다. 애초에 '감정수업'이라는 제목 자체가 모순적이었던것 같기도 하다.  감정은 학습보다는 경험이라고 생각하는 내게는 적어도 그랬다. 몇장 넘기다 말고 때려치고 싶었지만 끝가지 읽는 자에게 비판할 권리도 주어진다는 믿음으로 읽었다.

도시의 쓰레기 탐색자, 제프 페럴

물건을 버리는 사람들은 버리는 물건 자체를 통해 자신들이 인식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표식을 남기게 된다. p.71 결과적으로 한때 쓰레기로 버려진 물건들 때문에 길거리의 또 다른 세계는 물질문화의 풍요로움을 맛보게 된다. 수천 개의 쇼핑몰과 전통물품 상점, 소매점 등에서 끊임없이 배출되는 쓰레기가 바로 이 세계에 정착하면서 잃어버린 것들의 물질세계를 구축한 것이다. p.90-91 누군가의 잊힌 인생처럼, 쓰레기를 수집하다 보면 많은 잊힌 것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 세계의 모든 버려진 것들은 주인의 삶 가운데서 어느 날 문득 튀어나와 그 삶의 속도와 패턴에 대해 말해주곤 한다. p.159 도시의 특권츠과 가난한 사람들이 만나는 뒷골목과 쓰레기통들은 여전히 열려 있는 물질의 경계선이다. 비록 완전히 열려 있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상대적으로 꽉 막힌 종교적 자비심이나 정부 기관들의 소심함에 비한다면 쓰레기통과 쓰레기더미들은 상대적으로 훨씬 자유롭게 상호간의 필요를 채워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p.303-304 버려진 옷이나 깡통이 어디에 있는지, 매일매일 어떻게 살아남았는지에 대해 온통 관심을 쏟게 되는 길거리의 세계는 철저히 현실적이면서도 동시에 깊은 대안적 의미의 세상을 품고 있다. 내가 그렇게 살았듯, 그 세계에서 노동한다는 것은 오랜 세월에 결쳐 이루어진 오늘날의 소비문화를 무너뜨리는 작업에 동참하는 것이며, 법과 범죄의 경계를 허무는 작업이며, 시간과 공간, 정체성의 현실성을 되돌아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p.341 = 우리가 배출하는 쓰레기는 우리가 애지중지 보관하고 있는 것들보다 우리를 더 적나라하게 서술하고 있다. 하성란의 '곰팡이꽃'이 마냥 허무맹랑한 얘기로 느껴지지만은 않는 것도 그때문이다. 선뜻 나서 새로운 문화에 뛰어든 작가에게 박수를.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이 인공의 생태, 새로운 세계를 어떻게 기사로 다뤄 볼 방법은 없을까. 폐지 모으는 노인들이 단가 하락으로 애를 먹고 있다던가,

청춘의 문장들 +, 김연수

네 마음 속으로 그 어떤 손님들이 찾아온다고 해도 너는 언제나 너일 뿐, 그 손님들 때문에 다른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니 네 마음 속으로 찾아오는 손님들을 기꺼이 맞이하기를. 그가 어떤 사람이든 화를 내거나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거나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이지 말기를. p.9-10 언젠가도 그렇게 쓴 적이 있는데, 열망을 열망하고 연애를 연애하고 절망을 절망하던 시절이었죠.원하는 현실 대부분은 저 멀리, 아주 멀리 있었어요. 심지어 절망마저도. 그래서 진짜 절망하는 것도 힘들었던 시절이었어요. p.46 우리가 믿는 것들은 대개 무지와 오해에서 비롯된 환상일 가능성이 많다. 또 우리는 무지하지 않은데, 정치인 등이 우리를 오해하게 만들어 환상을 보게 하는 경우도 많다. 나는 그런 환상의 본질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소설을 썼다고 할 수 있다. p.62 이야기라는 건 이성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어떤 일들을 납득하기 위해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p.69 나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들에만 관심이 갈 뿐이다. 짐작과는 다른 일들, 혹은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만이 나의 관심을 끈다. 스무살 이후로 내게 삶이란 그런 일들만을 모아놓은 상점 같았다. ... 대체적으로 삶이란 짐작과는 다르다. 그 사실을 깨닫게 된 순간부터 나는 삶을 추측하는 일을 그만뒀다. 삶이란 추측되지 않았다. 그냥 일어날 뿐이었다. 소설은 그 일어난 일들의 의미를 따져보는 일이다. 짐작과 달랐던 일들의 의미를 나와 당신이 함께 납득해가는 과정이다. 삶의 어느 순간에, 당신이나 내게 진심으로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던, 혹은 진심으로 기뻐하게 만들었던 그 일들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는 걸 당신과 내게 납득시키는 일이다. 당신이나 나나 이제 다른 존재가 돼 살아가겠지만, 그 일들이 사라지지는 않으리라. p.100-101 봄날은 지나간다고 말할 때는 이미 봄날이 다 지나간 뒤다. 어제 피었다가 오늘 저녁에 떨어지는 꽃잎들처럼, 지나가는 봄날은 자취 없고 가뭇없다. 우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그대를 생각하며 밤을 마주할 때 나는 비밀이 된다. 무엇으로도 해독할 수 없는 암호가 된다. 그대는 오래 전부터 내게 비밀이었다. 내가 밤을 사랑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 그리하여 밤의 몸과 밤의 살갗과 밤의 온기를 나는 사랑한다. 밤에 그대는 어둠 속으로, 비밀 속으로, 스며들 것이다. p.93-94 한 사람을 위해서만 쏟아지던 감정이 갈 곳을 잃고 마음속에서 넘쳐나고 있었다. ... 그 집 식구들은 모두 스물넷에서 서른두 살 사이의 사람들이었다. 인생의 정거장 같은 나이. 늘 누군가를 새로 만나고 또 떠나보내는 데 익숙해져야만 하는 나이. 옛 가족은 떠났으나 새 가족은 이루지 못한 나이. 그 누구와도 가족처럼 지낼 수 있으니 다음날이면 남남처럼 헤어질 수 있는 나이. p.136-137 = 인생의 정거장에서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밤을 지나고 있다. 안녕과 안녕 사이에서 시간은 어떻게든 부지런히 흘러간다.

로맨스가 필요해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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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은 남자들과 입을 맞추고도 왜 내가 혼자 있는지 깨달았다. 내가 이 남자를 가장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가 바빠서 화가 난 게 아니었다. 네 시간을 기다려서 화가 난 게 아니었다. 첫키스를 한 지 1000일이 된 거, 그런 것쯤 나한테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냥, 그 말 몇마디면 되는데. 막차가 떠날 때까지 윤석현은 안왔다. 그때는 그게 나를 사랑하지 않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그냥 이 닫힌 문이 동굴이고, 그는 어두컴컴한 동굴에 들어가 겨울잠을 자고 있는 한 마리 곰일 뿐임을 안다. 그때의 나는 순수하고 아름다웠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다면, 조금 다른 연애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아쉬움만 남을 뿐이다. 사랑받고 싶었다. 하지만 구걸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원하는 건 뜨거움이 아니라 애틋함이다. 정답고 따뜻하고 반짝반짝한 느낌. 나에게 필요한건 로맨스였다. 지금 질투하는 거잖아. 왜, 질투하면 안돼? 질투하면 찌질한거야? 난 질투 유치하다고 생각 안해. 질투는 세상에서 가장 솔직한 고백이야. 질투라고는 모르는 너 같은 인간이 건강하지 않은거지. 생각해보니까 나는 한번도 너를 좋아하지 않은 적이 없었어.  도대체 진심이 뭔지 몰라서 지치고 힘든데, 근데도 난 너 좋아해. 미친거지 내가. 그 입맞춤이 좋았다. 첫키스보다 좋았다. 사랑한다는 말보다도 좋았다. 만진다. 잡는다. 간다. 온다. 가르친다. 외출한다. 본다. 느낀다. 슬퍼한다. 화난다. 밉다. 운다. 웃는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많이많이 사랑한다. 상처입는다. 상처입힌다. 키스한다. 그리고 잔다. 이 수많은 말들중에 나하고 상관 없는 거 있어? 넌 항상 끝이 아니야. 여기가 끝이다 싶으면 또 다시가. 어. 나는 끝까지 가는 사람이야. 마음이라는 건 육체의 어디에 붙어있을까. 어디에 붙은건지 몰라서 마음이 아플 때는 속수무책 앓고 있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