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태준, 바닥

바닥 문태준 가을에는 바닥이 잘 보인다 그대를 사랑했으나 다 옛일이 되었다 나는 홀로 의자에 앉아 산 밑 뒤뜰에 가랑잎 지는 걸 보고 있다 우수수 떨어지는 가랑잎 바람이 있고 나는 눈을 감는다 떨어지는 가랑잎이 아직 매달린 가랑잎에게 그대가 나에게 몸이 몸을 만질 때 숨결이 숨결을 스칠 때 스쳐서 비로소 생겨나는 소리 그대가 나를 받아주었듯 누군가 받아주어서 생겨나는 소리 가랑잎이 지는데 땅바닥이 받아주는 굵은 빗소리 같다 후두둑 후두둑 듣는 빗소리가 공중에 무수히 생겨난다 저 소리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러나 다 옛일이되었다 가을에는 공중에도 바닥이 있다 = 어디로 향해도 마음은 그저 바닥으로 툭 떨어지는 계절. 시를 읽기가 좋은 바람이 분다. 마음의 각질들이 부슬거리는 것도 오로지 날씨 탓으로 돌릴 수 있을까.

두 대륙이 사랑한 도시 이스탄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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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갈라타 탑이 보인다. 보스포러스 해협을 누빌 수 있는 유람선. '부디 내 인생에 두번째 터키가 있었으면 좋겠다.' 2014년 11월 겨울 휴가를 마치고 그런 생각을 했었다. 터키의 매력에 완전히 사로잡혀 한동안 빠져나오기가 힘이 들었다. 수천년의 고도 이스탄불의 왁자지껄한 화려함도 좋았고 어디로 눈을 돌려도 절경 뿐인 카파도키아의 우아한 척박함도 압도적이었다. 새하얗게 반짝이는 파묵칼레에서는 정말 더할 나위가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두번째 터키는 예상보다 일찍, 뜻밖의 기회로 찾아왔다. 별로 좋은 시기는 아니었다. IS 테러니 군부 쿠데타 미수니 해서 온통 국제면을 장식한 뒤였으니까. 관광객들의 발길이 뚝 끊겼다고 했다. 그 어느때보다도 헐값에  터키 구경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말들도 나오는 때였다. 나의 임무는 만연한 불안을 달랜 뒤 돌아선 사람들의 마음을 다시 터키로 붙잡아매는 일이었다. 갑자기 떨어진 출장에 전후 사정으로 미뤄보아 여러모로 안 가는게 이득이었지만, 오로지 터키라서, 터키이기 때문에 그래도 갔다. 탁심광장. 붉은 깃발이 파도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그게 벌써 한 달 전 일이다. 적어야지 적어야지 하던 게 많이 늦어졌다. 내가 다녀간 뒤로 터키는 다사다난한 일을 숱하게 겪었다. IS, 테러, 쿠데타, 새로운 독재. 국제 뉴스로 이런 소식을 접하면서 한없이 아름답고 매력적이던 이 나라가 생생하게 떠올라 눈이 시렸는데. 내가 다녀오고, 여행 기사를 출고하고, 조금 그 며칠을 잊었을 동안 터키는 꽤나 평온했었다. 그런데 지난주에 다시 아타튀르크 국제공항 인근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하면서 국제면 뉴스 거리가 됐다. 더 늦으면 영영 적지 못할 것 같아 뒤늦게 사진을 추려서 아무거라도 적어놓기로 하고 노트북을 열었다. 탁심 광장을 지나가는 엄마와 아이들. 변화 아닌 변화는 눈에 띄게 늘어난 국기에서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워낙에 이 나라가 국기를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알랭 드 보통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The Course of Love) 알랭 드 보통/김한영 옮김/은행나무 사랑을 유발했던 신비한 열정으로부터 눈을 돌릴 때 사랑이 지속될 수 있음을, 유효한 관계를 위해서는 그 관계에 처음 빠져들게 한 감정들을 포기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에 이를 것이다. 이제 그는 사랑은 열정이라기보다 기술이라는 사실을 배워야만 할 것이다. p.16 러브스토리는 누군가 우리를 다시는 보지 않으려 할까 봐 두려워할 때가 아니라, 그들이 우리를 항상 보는 일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때 시작된다. 그들이 도망갈 수 있는 기회가 도처에 널려 있을 때가 아니라 평생 서로의 포로가 되겠다는 엄숙한 서약을 나눌 때이다. ... 우리는 러브스토리들에 너무 이른 결말을 허용해왔다. p.27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니 입술이 가늘게 떨리는 것이, 마치 뜻 모를 밤의 언어로 혼자 책을 읽고 있는 것 같다. p.44 쾌청한 밤에 온 우주가 그들을 맞으러 내려왔다. 그녀는 안드로메다자리를 가리킨다. 비행기 한 대가 에든버러 성 위를 넘어 착륙을 위해 공항으로 직행한다. 바로 그 순간, 그는 이 사람이 함께 늙어가고 싶은 여자란 느낌이 확실해진다. p.59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이성적일 필요는 없다. 우리가 익혀두어야 할 것은 우리가 한두 가지 면에서 다소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쾌히 인정할 줄 아는 간헐적인 능력이다. p.116 두 사람 모두 친밀해지고 싶은 욕망 때문에 마음이 아플 수 있지만 그로 인한 어떤 결과로부터도 안전하다. 그들은 결코 분개할 필요가 없으며, 계속해서 서로를 좋은 마음으로 생각할 것이다. 미래가 없는 사람들만이 그럴 수 있듯이. p.209 결혼: 자신이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가하는 대단히 기이하고 궁극적으로 불친절한 행위. p.237 라비가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끼는 것은 타인에게 완전히 이해되기를 단념했기 때문이다. ... 라비가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끼는 것은 자신

또! 오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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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오해영(tvN) 울어도 되나요 -난 안 죽어요. 내가 요즘 가장 원하는 게 죽는 건데, 내가 원하는 건 안 이뤄지거든요. 그니까 난 안 죽어요 미필적 고의에 의한 인연 -여자는 아무리 취해도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말은 죽었다 깨어나도 안 해요. 술이 떡이 돼도 안 해요. 아무 상관 없는, 두번 다시 볼 일 없는 사람이면 모를까. 우리 아무 상관 없는 사이 될래요? -어떻게든 그냥 살아요. 피투성이라도 그냥 살아요. 살아남는 게 이기는 거야. 살고 싶을 땐, 사랑하기로 -학교 때 오해영이 둘이었어요. 다른 오해영은 되게 잘 나갔어요.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도는 줄 알았는데 걔 옆에만 가면 그냥 들러리. 근데 만약에 내가 왼전히 사라지고 걔가 된다면 그런 기회가 온다면 나 걔가 되기로 선택할까? 안 하겠더라고요. 난 내가 여기서 좀만 더 괜찮아 지길 바랐던 거지, 걔가 되길 원한 건 아니었어요. 난 내가 여전히 애틋하고, 잘 되길 바라요. 여전히.. -누가 나한테 말 좀 해줬으면 좋겠어요. 그거 아무것도 아니라고. 결혼 전날 차인 거, 아무 것도 아니라고. 끝까지 말 안해주네. 참 매정하다 -그게 어떻게 아무 것도 아니야? 세상이 나한테 사망선고 내린 기분, 우주에서 방출된 기분, 쫓겨난 우주에서 아양 떨면서 빌붙어 살아야 하는 기분. 그게 어떻게 아무것도 아니야? 난 결혼식 당일에 차였어. 한 대 맞고 쓰러진 거야. 좀 쉬었다가 일어나면 돼. -별 일 아니라는 말보다, 괜찮을 거란 말보다, 나랑 똑같은 상처를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게 백배 천배 위로가 된다. 생각해보면 '다 줄 거야' 하고 원 없이 사랑한 적이 한 번도 없다. 항상 재고, 맘 졸이고, 나만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닌가 걱정하고. 이젠 그런 짓 하지 말자. 정말 마음에 드는 사람 만나면, 발로 채일 때까지 사랑하자. 꺼지라는 말에 겁 먹어서 눈물 뚝뚝 흘리면서, 조용히 돌아서는 그런 바보 같은 짓은 다시 하지 말자. 꽉 물고 두드려 맞아도 놓지 말자. 아낌 없이

2016 제7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2016 제7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금희, 기준영, 정용준, 장강명, 김솔, 최정화, 오한기 /문학동네 양희야, 양희야, 너 되게 멋있어졌다. 양희야, 양희야, 너, 꿈을 이뤘구나, 하는 말들을 떠올리다가 지웠다. 안녕이라는 말도 사랑했니 하는 말도 구해줘라는 말도 지웠다. 그리고 그렇게 지우고 나니 양희의 대본처럼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도 어떤 것은 아주 없음이 되는 게 아니라 있지 않음의 상태로 잠겨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남았다. ... 필용은 오래 울고 난 사람의 아득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 질문들을 하기에 여기는 너무 한낮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정오가 넘은 지금은 환하고 환해서 감당할 수조차 없이 환한 한낮이었다. p.43 (너무 한낮의 연애, 김금희) 그는 변화를 즐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한때 모든 걸 정리해 진과 함께 홍콩에 가서 살 생각을 했던 적도 있었다. 그 생각은 실현 가능성이 없어 보여서 낭만적인 데가 있었다. 그는 경솔한 사람처럼 그 생각의 낭만성을 읊었다. p.68 (누가 내 문을 두드리는가, 기준영) 어쩌면 소설이라는 도구는 인간 군상 속에 매몰되어 있는 개인을 입체적으로 발굴해내는 흙손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입체적 개인을 평면에 눌러 인간 군상 속에 숨기는 압착기인지도 모르겠다. p.203 (유럽식 독서법, 김솔) = 너무 한낮의 연애라니, 제목부터 마음을 이렇게 툭 건드려도 되나 싶다. 단편소설의 매력을 모르던 시절이 있었다. 하다 만 이야기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그 토막난듯한 이야기들의 여운이 참 좋다.

부산행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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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행 TRAIN TO BUSAN, 2016 액션 ,  스릴러 한국 118분 2016 .07.20  개봉 연상호 공유 (석우),  정유미 (성경),  마동석 (상화) 왜그랬어, 다 태울수 있었잖아 이 미친 새끼야! 여기있는 사람들은 살아야 할 거 아냐! 이새끼.. 감염됐어. 놀고들 있네. 언니 수고 많았어. 저희 잘못 아니죠? 저희는 그냥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들이잖아요.  저는 이 방송이 끝나는 대로 운행 가능한 열차를 좌측 끝 선로, 좌측 끝 선로에 배치하겠습니다. 그럼 생존자 여러분 행운을 빕니다.  터널이 어두워서 생사판정이 불가능합니다. 그럼 사살하라.  = 한국형 좀비 영화, 관객 몰이만큼은 성공한 듯 하다. 심심풀이로 보기에도 나쁘지 않았다. 좀비의 안무도 좋았고, 고속열차 안이라는 공간적인 특수함 등등이 볼거리를 더했다. 어두운 데서 보지 못하는 좀비란 특색도 인상깊었다. 좀비 에스컬레이터, 좀비 아쿠아리움 등등 좀비 떼거지가 보여주는 비주얼도 감각적?이었다고 본다.  마냥 오락 영화는 아니었다. 감독이 세월호를 많이 생각했었다고 인터뷰했었는데 그런 대목도 많이 눈에 들어온다. 꽤나 길게 잡혔던 장관? 국민안전처장?의 권태로운 뉴스 인터뷰. 믿고 안심하시고, 집에 계시라고. 동시다발적 시위를 진압하고 있다고 하는 부분 너무 현실감있어서 슬펐다. 목숨을 걸고 끝까지 직을 다하는 기관사의 모습은 세월호 선장의 속옷 차림 줄행랑과 대비된다.  인간 군상들이 보여주는 민낯도 마찬가지. 여기있는 사람이라도 살아야 한다는 아우성이 섬칫하면서도 막상 저 위치에서 나는 어느 편에 설 수 있을것인가를 비춰보게 했다. 동생 할머니가 문을 열어젖히는 장면에서는 카타르시스마저 느꼈다.  하지만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큰 법. 감독이 연상호라는 점만 빼면 훌륭하다고 누가 그랬었는데 그게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