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애의 마음, 김금희

경애의 마음 김금희 / 창비 사랑이 시작하는 과정은 우연하고 유형의 한계가 없고 불가해했는데, 사라지는 과정에서는 정확하고 구체적인 알리바이가 그려지는 것이 슬펐다. 가난과 폭력, 배신과 거짓말, 종교, 정치, 국적의 차이, 집안싸움, 부모 반대, 언니 또는 형의 반대, 동생의 반대, 베프나 은사의 반대 호근 기르는 고양이나 개의 반대, 윤리적 판단 - 불륜, 제삼자의 출현 - 같은 일종의 유형들이 있었다. 그렇게 소멸은 정확하고 슬픈 것이었다. p.35 그러면서도 모든 것이 끝났다고는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마음이 끝나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끝나지 않은 것이 아닌가. 대체 끝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어떻게 실감하고 확신하는지 알 수 없었다. 끝이 만져진다면 모를까. 느끼는 것이고 상상하고 인식하는 것인데 지금 내가 그렇지 않은데 어떻게 끝을 말해. 끝을 말하려면 지금 발밑에서 너풀거리며 나뒹구는 아이스크림 포장이나, 택시의 노란 헤드라이트 불빛같이 눈앞에 지나가는 어떤 것도 아픔을 환기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어야했다. 어떤 풍경도 산주를 떠올리게 하지 않고 지시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는 경애에게는 모든 것이 산주와 관련된 듯 느껴졌다. p.60 전혀 알지도 못하던 사람들이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기 위해서는, 그렇게 안녕하기 위해서는 아주 많은 행운이 작용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태어나야 했고 자라야 했고 먹어야 했고 사고를 피해야 했고 견뎌야 했다. 무엇보다 불운을, 불운이라고 말하면 대체 피할 수 있는 건가 싶은데, 적어도 살아 있다면 피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경애는 알았다. p.62 경애 엄마는 경애가 씻는 것, 머리를 감고 이를 닦고 세수를 하는, 누구나 하루에 한번쯤은 귀찮아도 후다닥 해내는 그런 일마저도 너무 무거운,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남들에게는 자신을 방치하는 일이고 자신에게는 최선인 그런. p.104 미안해, 나는 아무래도 늦을 것 같아.....

박준, 세상 끝 등대 1

세상 끝 등대 1 박준 내가 연안을 좋아하는 것은 오래 품고 있는 속마음을 나에게조차 내어주지 않는 일과 비슷하다 비켜가면서 흘러들어오고 숨으면서 뜨여오던 그날 아침 손끝으로 먼 바다를 짚어가며 잘 보이지도 않는 작은 섬들의 이름을 말해주던 당신이 결국 너머를 너머로 만들었다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시인선 032 = 오래 품고 있는 속마음 비켜가면서 흘러들어오고 숨으면서 뜨여오더니 너머가 되어버린 것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김혼비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김혼비 / 민음사 나를 포함, 대부분의 여자 축구 팬들 머릿속 검색창에 '축구'를 쳤을 때 뜨는 이미지들은 아마 몇 년도 무슨 경기에서 어떤 선수가 터뜨린 역전골이라거나, 응원하는 팀이 우승했던 순간, 좋아하는 선수의 안타까운 부상, 이런 것들일 것이다. 반면 남의 축구는 거의 보지 않는 이 '축구하는 여자들' 머릿속에 뜨는 것들은 본인이 넣었던 첫 골, 본인이 경기 중 저지른 뼈아픈 실책, 우리 팀이 역전승하던 날, 우리 팀 유니폼 같은 것들일 것 같다. 그 속에는 오직 나 자신, 내가 속한 팀만이 있다. 어느 프로 축구팀의 어느 유명 선수가 끼어들 틈 없이. '축구'와 관련해서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자신의 몸에 새겨진 경험들로만 꽉 채워져 있는 여자들. ... 나는 가능한 한 축구의 많은 면을 만나려고 하는데, 그녀들은 오직 자신과 직접 맞닿는 면을 통해서만 축구를 만난다. 그 우직한 집중. p.43 이쪽으로 갈 것처럼 오해하게 만들고는 저쪽으로 도망가고, 이쪽으로 패스하는 척하다 저쪽으로 패스하고, 골대 왼쪽으로 차는 척하다가 오른쪽으로 차서 골인시키는, 누군가의 오해를 이용해서 원하는 것을 얻는 게임.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오해 유발'이야말로 아웃사이드 드리블의 사명인 것이다. ... 피치 위에서도 피치 밖의 세상에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오해를 만들고 오해를 하고 오해를 받고 오해로 억울해하고 힘들어하지만, 그래도 어떤 오해는 나를 한 발 나아가게 한다. p.75 하나의 같은 사건이 사람들에게 가닿을 때는 제각각 다른 모양의 그릇이 된다. 모양 따라 흘러 담기는 마음도 다르고 그걸 세상에 내미는 방식도 다르다. 아무것도 안 담겨서 내밀 게 없는 사람도 있다. p.193 공은 윤자 언니의 발 앞에 떨어졌고 경기는 계속됐다. 누군가가 떠나가도, 그 여파로 잠시 주춤해도, 양발을 여기 이 땅에 딱 붙이고 공을 던지면 멈췄던 축구는 그렇게

박준, 저녁 - 금강

저녁 - 금강 박준 소멸하는 약력은 나도 부러웠다 풀 죽은 슬픔이 여는 길을 알고 있다 그 길을 따라올라가면 은어가 하루처럼 많던 날들이 나온다 저녁 강의 시야(視野)가 그랬다 출발은 하겠는데 계속 돌아왔다 기다리지 않아도 강변에서는 공중에서 죽은 새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땅으로 떨어지지도 않은 새의 영혼들이 해를 등지고 다음 생의 이름을 점쳐보는 저녁 당신의 슬픈 얼굴을 어디에 둘지 몰라 눈빛이 주저앉은 길 위에는 물도 하릴없이 괴어들고 소리 없이 죽을 수는 있어도 소리 없이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우리가 만난 고요를 두려워한다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시인선 032 = 온통 새하얗고 드넓은 눈밭 위로 칠흑같은 어둠이 내려앉은 극지의 밤, 이불 속에 웅크려 이 시를 읽으면서 눈빛이 주저앉은 길이 어떤 건지, 조금 알 것 같아서 마음이 먹먹했었다.

이제니, 후두둑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일 뿐

후두둑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일 뿐 이제니  그래봤자 결국 후두둑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일 뿐. 오늘부터 나는 반성하지 않을 테다. 오늘부터 나는 반성을 반성하지 않을 테다. 그러나 너의 수첩은 얇아질 대로 얇아진 채로 스프링만 튀어오를 태세. 나는 그래요. 쓰지 않고는 반성할 수 없어요. 반성은 우물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너의 습관. 너는 입을 다문다. 너는 지친다. 지칠 만도 하다. 우리의 잘못은 서로의 이름을 대문자로 착각한 것일 뿐. 네가 울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면 나는 둘중의 하나를 선택하겠다고 결심한다. 네가 없어지거나 내가 없어지거나 둘 중의 하나라고. 그러나 너는 등을 보인 채 창문 위에 뜻 모를 글자만 쓴다. 당연히 글자는 보이지 않는다. 가느다란 입김이라도 새어나오는 겨울이라면 의도한 대로 너는 네 존재의 고독을 타인에게 들킬 수도 있었을 텐데. 대체 언제부터 겨울이란 말이냐. 겨울이 오긴 오는 것이냐. 분통을 터뜨리는 척 나는 나지막이 중얼거리고 중얼거린다. 너는 등을 보인 채 여전히 어깨를 들썩인다. 창문 위의 글자는 씌어지는 동시에 지워진다. 안녕 잘 가요. 안녕 잘 가요. 나도 그래요. 우리의 안녕은 이토록 다르거든요. 너는 들썩인다 들썩인다. 어깨를 들썩인다. 헤어질 때 더 다정한 쪽이 덜 사랑한 사람이다. 그 사실을 잘 알기에 나는 더 다정한 척을, 척을, 척을 했다. 더 다정한 척을 세 번도 넘게 했다. 안녕 잘 가요. 안녕 잘 가요. 그 이상은 말할 수 없는 말들일 뿐. 그래봤자 결국 후두둑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일 뿐. <아마도 아프리카> 창비시선 321 창비 = 그저 봄이 오긴 오는 것이라고 믿으며.

대량살상 수학무기, 캐시오닐

대량살상 수학무기 캐시 오닐 지음/ 김정혜 옮김 / 흐름출판 수학 모형은 여러 가지 면에서 신을 닮았다. 신처럼 불투명해서 이해하기 힘들다. 각 영역의 최고 사제들, 즉 수학자와 컴퓨터 과학자들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에게도 내부의 작동 방식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리고 신의 평결처럼, 잘못되거나 유해한 결정을 내릴지라도 반박하거나 수정해달라고 요구할 수 없다. 무엇보다 사회적 약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차별하고 부자는 더욱더 부자로 만들어주는 경향이 있다. 나는 이런 유해한 모형들의 적절한 이름을 생각해보았다. 바로 '대량살상수학무기 Weapons of Math Destruction', 줄여서 WMD다. p.16 그 모든 놀라운 능력에도 불구하고 기계들은 공정성을 제고하기 위해 그 무엇도 조정할 수 없다. 최소한 기계 스스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데이터를 샅샅이 조사하고 무엇이 공정한지 판단하는 것은 기계로선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영역이며 지독히도 복잡한 일이다. 오직 인간만이 시스템에 공정성을 주입할 수 있다. p.259 그런 기계들은 매우 효율적이겠지만 약간 제멋대로며, 절대적인 불가지의 영역으로 남게 될 것이다. 누구도 기계들의 논리를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세상이 올지 모른다. 만약 인간이 통제 수단을 되찾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미래의 WMD는 강력하고 신비로운 존재가 될 것이다. 아니, WMD가 우리를 제멋대로 다루는데도 우리는 그런 사실조차 거의 모른 채 살아갈지 모른다. p.288 데이터 처리 과정은 과거를 코드화할 뿐, 미래를 창조하지 않는다. 미래를 창조하려면 도덕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그런 능력은 오직 인간만이 가지고 있다. 우리는 더 나은 가치를 알고리즘에 명백히 포함시키고, 우리의 윤리적 지표를 따르는 빅데이터 모형을 창조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가끔은 이익보다 공정성을 우선시해야 한다. p.337 = 새 직장에 들어와서 보니까 온통 모르는 세계였다. 나는 작동 원리조차 가늠하기 힘든

심보선, 청춘

청춘 심보선 거울 속 제 얼굴에 위악의 침을 뱉고서 크게 웃었을 때 자랑처럼 산발을 하고 그녀를 앞질러 뛰어갔을 때 분노에 북받쳐 아버지 멱살을 잡았다가 공포에 떨며 바로 놓았을 때 강 건너 모르는 사람들 뚫어지게 노려보며 숱한 결심들을 남발했을 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을 즐겨 제발 욕해달라고 친구에게 빌었을 때 가장 자신 있는 정신의 일부를 떼어내어 완벽한 몸을 빚으려 했을 때 매일 밤 치욕을 우유처럼 벌컥벌컥 들이켜고 잠들면 꿈의 키가 쑥쑥 자랐을 때 그림자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에서 그 그림자들 거느리고 일생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을 때 사랑한다는 것과 완전히 무너진다는 것이 같은 말이었을 때 솔직히 말하자면 아프지 않고 멀쩡한 생을 남몰래 흠모했을 때 그러니까 말하자면 너무너무 살고 싶어서 그냥 콱 죽어버리고 싶었을 때 그때 꽃피는 푸르른 봄이라는 일생에 단 한 번뿐이라는 청춘이라는 <슬픔이 없는 십오 초> 문학과지성 시인선 346 문학과지성사 = 나 여전히 일생에 단 한 번뿐이라는 그 시간을 살아내고 있구나 싶어서, 눈물도 웃음도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