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옆에 있는 사람, 이병률

 
내 옆에 있는 사람
이병률
달(2015)


만약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거든
많이 먹지 말고 속을 조금 비워두라.
잠깐의 창백한 시간을 두라.
혼자 있고 싶었던 때가 있었음을 분명히 기억하라.
어쩌면 그 사람이 누군가를 마음에 둘 수도 있음을,
그리고 둘 가운데 한 사람이
사랑의 이사를 떠나갈 수도 있음을 염두에 두라.
다 말하지 말고 비밀 하나쯤은 남겨 간직하라.
그가 없는 빈집 앞을 서성거려보라.
우리의 만남을 생의 몇 번 안 되는 짧은 면회라고 생각하라.
그 사람으로 채워진 행복을
다시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함으로써 되갚으라.
외로움은 무게지만 사랑은 부피라는 진실 앞에서 실험을 완성하라.
이 사람이 아니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예감과 함께 맡아지는
운명의 냄새를 모른 체하지 마라.
함께 마시는 커피와 함게 먹는 케이크가
이 사람과 함께가 아니라면 이런 맛이 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라.
만날 때마다 선물 상자를 열 듯 그 사람을 만나라.
만약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거든.

문득 길을 가다 만나는 찐빵 가게에서 솥 바깥으로 치솟는 훈김 같은 것. 사랑은 그런 것. 호기롭게 사두었다가 오 년이 되어도 읽지 못하는 두꺼운 책의 무거운 내음 같은. 사랑은 그런 것. 여행지에서 마음에 들어 샀지만 여행을 끝나고 돌아와서는 입을 수 없는 옷의 문양 같은 것. 머쓱한 오해로 모든 것이 늦어버려 아물어지지 않는 상태인 것. 실은 미안하지만 동시의 누구의 잘못도 아닌 것. 들의 입자처럼 촘촘하지만 실은 헐거운 망사에 불과한 것. 사랑은 그런 것. 백년 동안을 조금씩 닳고 살았던 돌이 한순간 벼락을 맞아 조각이 돼버리는 그런 것. 시들어버릴까 걱정하지만 시들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시들게 두는 것. 또 선거철에 거리의 공기와 소음만큼이나 어질어질한 것. 흙 위에 놀이를 하다 그려놓은 선들이 남아 있는 저녁의 나머지인 것.

마취를 해도 마취가 안 되는 기억의 부위가 하나쯤 있었으면 한다 그것으로 가끔은 화들짝 놀라고 다치고 앓겠지만 그런 일 하나쯤 배낭이라 여기고 오래 가져가도 좋을 테니. 

다른 사람에게 내 사랑을 알리게 되는 이유는 내 사랑의 안전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내 사랑이 비밀이 아닌 이상 사랑을 더 지키려 할 것이며 본능의 힘으로 더 지속하려 한다. 한 사람에게라도 내 사랑을 말하고 싶은 것은 세상 한쪽에 자신의 감정을 신고함으로써 이제 사랑의 어떠한 일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겠다고 다잡는 것이다.
사랑을 통해 성장하는 사람, 사랑을 통해 인간적인 완성을 이루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명백히 다를 수밖에 없다. 사랑은 사람의 색깔을 더욱 선명하고 강렬하게 만들어 사람의 결을 더욱 사람답게 한다. 사랑은 인간을 퇴보시킨 적이 없다. 사랑은 인간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다.
우리가 어떤 사랑에 닿을 수 없다 하더라도, 그 사랑을 이룰 수 없다 하더라도 마음이라는 우주 안에 영원히 떠돌며 자라는 것이 사랑이다. 손바닥만한 사람 망므은 누군가를 사랑할 때 우주로 팽창한다. 듣지 못했던 소리를 들으며 울지 않았던 눈물을 흘린다.
우리는 사랑에게 엄청난 많은 것들을 배웠으므로 그만큼의 빚을 지고 산다. 그것도 갚을 수 없는 아주아주 큰 빚을. 

여름이면 사람들은 팔꿈치 상처를 보고 놀라며 왜 그랬냐고 묻지만 내 좋은 마음으로만 어느 한 시절을 지고 갈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준 증표쯤으로 여기고 산다.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생길수록 살고자 하는 길의 방향이 더 선명해지고, 살아가야 할 이유 또한 명백해지니 나는 그저 그것이 고맙다.
습격을 받아 전부를 잃어버려 덮어도 덮어지지 않는 마음이 있기는 해도 이제는 괜찮다. 더 큰 파도를 기다린다. 더 큰 파도가 나를 덮쳐도 기꺼이 맞이하겠다. 세상 끝까지 휩쓸려가서 찬란히 쓰러져주겠다.


=

따듯해서 좋았다. 사진도 글도 그랬다. 언젠가부터 즐겨 읽고 있었다. 오랜만에 나온 이번 산문집은 그간의 책의 국내버전이라고 봐야 할까. 세계 곳곳의 이국적인 풍경 대신 익숙한 것들에 머무른 다정한 시선이 담긴 사진들이 페이지를 메웠다. 어쩌면 내내 지나치고 있었을지 모르는 아주 평범해서 더 특별한 찰나의 순간들 말이다.
곁에 적힌 글귀 또한 그랬다. 문장으로 구체화하지 못하고 언젠가 드문드문 생각하기만 했던 것들. 사람에 대한 애정들, 사람을 보는 방법들. 그런게 담백한 문체로 적혔다.
처음에는 작가의 문장이 부러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따듯한 시선이 부럽다.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 그것부터 부럽다.
이번 책에도 여느 때처럼 명심해야 할 구절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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