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제42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손홍규

2018 제42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손홍규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
구병모, 정찬, 방현희 , 조해진, 정지아 / 문학사상


누군가를 상실한 사람은 유예 기간을 겪어야만 진정한 슬픔에 이르게 되지. 상실한 사람의 부재를 거듭 느끼면서 - 먹을 사람은 없는데 자기도 모르게 밥상 위에 수저 한 벌을 올려놓았다가 혹은 방구석에서 그이의 유품임이 분명한 잡동사니를 발견했을 때처럼 최초의 상실 이후에 되풀이해서 똑같은 상실을 겪어야 한다는 걸, 한 번 상실하게 되면 영원히 상실하게 된다는 걸 깨달으면서 점점 더 깊은 슬픔에 이르게 되니 말일세. 단순하고 우둔한 사람에게도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고 섬세하고 예민한 사람이라면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다네. 깊은 슬픔은 단번에 그냥 주어지지 않아. 그것은 오히려 고통을 겪은 사람이 획득해야만 하는 것과 같다네.
p.65

뒤돌아서는 청년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면 어떤 역할도 떠맡지 않을 사람 같았다. 만약 그런 배우가 있다면 평생 무대에는 한 번도 오르지 못하겠지만 그 배우에게는 이 세계 전체가 무대가 될 것이었다. 청년이 문을 열었다. 바깥은 어둑어둑하고 싸늘했다. 청년은 그예 스스로를 세상이라는 거대한 무덤에 매장하기 위해 발인해 가듯 바깥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p.67

그는 예쁘지도 않고 다정하지도 않은 이 여자와 더불어 평생을 해로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생각이 들자 마음속이 뜨뜻해졌다. 얼굴을 붉히거나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지만 괜히 울고 싶어졌고 그런 심정을 행여 들킬세라 고개를 숙인 채 아직 아내는 아니었지만 아내가 될 게 분명하며 아내일 수밖에 없고 과거에도 미래에도 어쩌면 전생에도 다음 생에도 아내일 것 같고 아내여야만 하는 아내가 차려준 최초의 밥상을 말 없이 달게 먹었다.
p.110

-손흥규,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

잊었던 일들, 잊어싸고 믿었던 일들, 잊을 수 없는 일들이 한꺼번에 그에게 들이닥쳤다. 산 자식보다 죽은 자식이 그리워지는 날이 올 줄은 알았다. 그는 한 번도 아름다웠던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선량했던 적도 순수했던 적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를 사랑했던 것만 같았다. 목숨이 하늘과 같이 가지런하다고 믿어도 좋을 만큼 고요하고 차갑고 가벼운 밤이었다.
p.135

-손홍규, <정읍에서 울다>

사실 나는 절망을 말하고 싶다. 절망한 사람을 말하고 싶다. 절망한 사람 가운데 정말 절망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많지 않은 이유를 말하고 싶다. 멀쩡하게 웃고 떠들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고 슬퍼하고 사랑을 나누는 사람인데 깊이 절망한 사람이기도 하다는 걸 말하고 싶다.
p.147

불시에 닥쳐온 개인의 재난. 그 앞에서 흔히 옛사람들이 그렇듯이 당신은 스스로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벌을 받는 것일까 생각해보았을 테고, 이런 처벌을 받아도 괜찮을 만큼 큰 죄를 지은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왜 당신에게 이런 형벌이 주어졌는지 의아해했을 것이다. 운명을 이해해보려는 시도는 이처럼 실패할 수밖에 없었을 테고 이윽고 아버지는 이 세계를, 당신 자신을 증오하게 되었을 것이다. 무언가에 깊이 절망한 사람은 그 무언가를 깊이 사랑하는 사람과 분간하기가 어렵다. 깊은 절망은 깊은 사랑과 닮은 구석이 있다. 절망이 가득한 눈으로 노을이 진 서편 하늘을 바라보는 이의 눈빛이 아름다워 보일 수도 있는 것처럼.
p.150

-손홍규, 문학적 자서전


=

손흥규의 소설은 처음이었다. 묵직한 울적함을 꾹꾹 눌러담고는 그 위에 이야기를 도색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덧칠된 이야기가 그 울적함을 따스하게 데운다. 약불에서, 진득하게. 그 느낌에 매료되었다.

문학적 자서전을 통해 그 뿌리를 얼추 가늠할 수 있었다. 어린 나이부터 재난과 절망에 대해 고민하면서 우울이 농익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스스로 그걸 치유하는 방식을 터득한 게 아닐까. 직접 앓아본 사람만이 남에게도 건넬 수 있는 위로가 있다. 고작 두 편을 읽었을 뿐인데, 그의 소설이 그런 듯하다.

소설도 소설이지만 사부곡과 다름없는 문학적 자서전이 특히나 참 먹먹하고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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