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욱, 얼음처럼

얼음처럼


이장욱



나는 정지한 세계를 사랑하려고 했다.
자신을 의심하지 않는 세계를
나는 자꾸 물과 멀어졌으며
매우 견고한 침묵을 갖게 되었다.

나의 내부에서
나의 끝까지를 다 볼 수 있을 때까지
저 너머에서
조금씩 투명해지는 것들을.

그것은 꽉 쥔 주먹이라든가
텅 빈 손바닥 같은 것일까?
길고 뾰족한 고드름처럼 지상을 겨누거나
폭설처럼 모든 걸 덮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가위바위보는 아니다.
맹세도 아니다.

내부에 뜻밖의 계절을 만드는 나무 같은 것
오늘 아침은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하다
는 생각 같은 것
알 수 없이 변하는 물의 표면을 닮은.

조금씩 녹아가면서 누군가
아아,
겨울이구나.
희미해.
중얼거렸다.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 문학과지성사>



=

이장욱 시인의 시집.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곱씹으며 읽을 수 밖에 없는 시들이 즐비했다.
한 편 한 편, 문장마다 들어선 시어들은 단정하고도 깊숙하게 마음을 울렸다.

'얼음처럼'이라는 이 시에 시집의 제목이 등장한다. 겨울에 읽으니 계절감이 더했다.
알 수 없이 모호한 것들, 모든 것이면서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이 각자의 내면에서 차츰 투명해지고 또 단단해진다. 결코 영원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모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수려한 시들 가운데서 유독 표지에 적힌 시인의 말이 와닿았다.
아래와 같다.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하다
고 중얼거렸다.
그것이 차라리 영원의 말이었다.
물끄러미
자정의 문장을 썼다.
나는 의욕을 가질 것이다."



참고로 읽음직한 한겨레 토요판 시 코너의 이장욱 시인 글.
'책보다 소중한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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