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사지사, 비페이위

마사지사

비페이위/문현선옮김/문학동네



이런 생각들이 사람들을 미치게 했다. 사람들이 미치니 돈도 미쳤다. 돈이 미치니 사람들은 더 미쳤다. 미친 사람은  쉽게 지친다. 지치면 어떻게 해야 하나? 중국 전통 마사지 추나가 의심할 나위 없이 좋은 방법이었다.
p.16


자본의 원시축적을 위한 사푸밍의 파란만장한 노정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마르크스는 자본의 원시축적이 죄악을 동반한다고 말했다. 사푸밍의 경우에는 죄악을 동반할만한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 조건이 충분하지 않았다. 그의 자본의 원시축적이 동반한 것은 희생이었다. 그는 자신의 건강을 희생했다.
p.54


부자는 도시와 도시 사이를, 병원과 병원 사이를 돌아다녔다. 어린 샤오마는 줄곧 길 위에 있었고, 매번 목적지가 아닌 절망에 도달했다.
p.70


사랑은 천리 둑이 개미굴 하나에 무너지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 개미와 같다. 샤오쿵은 자신의 천리 둑에 아주아주 작은 구멍을 하나 냈을 뿐이었다. 나중에 가서 어떻게 막아보려는 마음이 들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샤오쿵은 울어버렸다. 실컷 울고 난 뒤에는 사랑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p.138


진옌은 굳게 믿고 있었다. 사랑에 빠진 여자의 심장은 뛰고 있는 매 순간마다 의미를 가진다고. 심장이 한 번 뛸 때마다 그녀의 연인이 조금씩 가까이 다가온다고. 가까이, 좀더 가까이, 조금 더, 더 가까이.
p.161-162


책에선, 아름다움은 숭고함이라 한다. 숭고함이라나 무엇인가?
책에선, 아름다움은 온유함이라 한다. 온유함이란 무엇인가?
책에선, 아름다움은 조화로움이라 한다. 조화로움이란 무엇인가?
고귀한 순수란 뭘까? 위대한 고요는? 장엄함은 무엇이고 화려함은 또 뭘까? 섬세한 정교함은 무엇이며, 아득한 오묘함이란 뭘까? 물빛이 반짝이며 빛난다는 것은? 산빛이 아련하다는 것은 뭘까?
...
맹인들은 이 세계를 '사용'할 뿐, 이 세계를 '이해'할 수는 없었다.
문제는, '아름다움'은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해야만 하는 성질의 것이라는 데 있었다.
p.180-181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일종의 한계였다. 그러나 볼 수 있다는 것 또한 일종의 한계였다.
...
인류는 거짓말을 해왔다. 인류는 혼자 사랑에 빠졌다. 인류는 시간을 상자 안에 넣어두고 그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그것을 볼 수 있다고 착각했다. 그리고 그것을 째깍이게 했다. 시간 앞에서는 모두가 맹인이다. 시간의 진실된 모습을 보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시간에서 벗어나는 것.
p.208




=

맹인됨을 이렇게 문장으로 치밀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게 놀랍다.
꽤 분량이 긴 소설인데도 단숨에 읽을 수 있었다. 한발짝 물러서서 덤덤하게 털어놓는듯한 문체가 마음에 들었다. 중국어 공부를 한 직후에 보아서인지 뭔가 중국어 특유의 어투가 느껴지는 듯도 했다. HSK 성적표 나오면 이런말 쏙 들어가겠지만.

아무튼 보이지 않는 마사지사들의 삶의 무게가 문장을 거쳐 피부로 오롯이 느껴졌다.
그들만의 세계에는 그 세계를 지탱하는 규칙이 있다. 일상이 있고 사랑과 고민이 있다. 그들만의 삶이 있다. 그 삶의 총체와 거기 아로새겨진 굴곡과 상처, 영광과 기쁨이 깊숙하고 무겁게 다가온다.

더 나아가 그들이 볼 수 없어서 되려 선명하게 보는, 세상살이의 진리가 덤덤한 문장으로 불쑥불쑥 튀어올랐다. 현자의 잠언처럼 그렇게 간결하면서도 짙었다. 그래서 이건 맹인 마사지사들의 얘기가 아니라 인간들의 얘기다.

결국에는 모두가 행복했을까? 저마다 짊어진 번민에도 불구하고 끝내는 더 행복해지기 위해 살아가야 하므로. 어떻게든 더 나은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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