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락자백, 우치다 히로후미 외

전락자백

우치다 히로후미+야히로 미쓰히데+가모시다 유미/김인회+서주언 옮김/뿌리와이파리



전락에 이르는 8가지 특징
a. 일상생활로부터 격리
b. 타자에 의한 지배와 자기통제감의 상실
c. 증거 없는 확신에 의한 장기간의 정신적 굴욕
d. 사건과 관계없는 수사와 인격부정
e. 전혀 들어주지 않는 변명
f. 언제까지 계속될 지 모르는 미래에 대한 전망 상실
g. 부인의 불이익을 강조
h. 취조관과의 '자백적 관계'
p.94


의학이나 심리학의 세계에서 '상처받기 쉬운 사람들'이란 어린아이들이나 지적장애, 발달장애, 학습장애, 우울증이 있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쓰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상처받기 쉬운'이란 '공격, 비난, 유혹 등을 받기 쉽고, 그것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어렵고, 상처받기 쉬운'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면접이나 취조 장면에서 때로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혹은 그렇게 되기 바라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신뢰할 수 없고, 오해를 부르기 쉬우며, 또는 자신에게 죄를 씌울 정보를 제공해버리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영국 경찰실무규범에서 인용).
p.122


각각의 사건에 관해 '합리적인 의문'이 있는지는 그 사건을 담당한 개개의 재판관이 결정합니다. 그러나 개개의 재판관의 주관에 따라 결정되어도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형사재판은 법에 의한 재판이 아니라 사람에 의한 재판으로 추락해버립니다. 재판관의 '자유로운 판단'이란 개개의 재판관의 '주관적인 판단'이 아니고 '자유로운 재량판단'도 아닙니다. 그 판단ㄷ과정이 '건전한 사회상식'에 합치하고, 역사적인 검증을 견디는 '합리적'인 것인 것이어야만 합니다.
p.209


재판이라고 하는 것이 참으로 헌법이 정한 법의 이상에 따르고 있는지 여부는 시대를 넘어 계속 검증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p.228


이와 같은 재판실무를 반영하여 일본의 형사재판 유죄율은 99.9%가 되었습니다. 이 숫자는 검찰관이 기소하면 거의 전부 유죄가 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일본에서 피고인이 유죄인지 무죄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실질적으로는 재판관이 아니라 수사본부를 움직이는 경찰조직이며 이를 받아서 소추하는 검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취조라는 명목으로 자백을 추궁하고 거기에서 만들어진 작문의 자백조서를 재판소가 추인하는 일본형 자백의존이라는 현상에서 '원죄의 구조'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p.255



=

짓지 않은 죄를 자백하는 바람에 실형을 받았다가 무고함이 밝혀진 네 건의 사건. 이를 '원죄'라고 칭한다. 이런 번복이 무고한 시민들의 평온한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고 영원히 복구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원죄를 만드는 자백은 '전락자백'이라고 했다. 낯선 단어지만 정확하다.
'설원 프로젝트'는 원죄로 인한 피해를 뿌리뽑고 '전락자백'으로 망가진 사람들을 지원하기 위해 마련됐다. 책은 이 프로젝트 담당자들이 수년에 걸쳐 연구하고 분석한 내용을 담고 있다.

우리나라는 아니고 일본 얘기다. 책은 경찰 사건 기록부터 조서, 검찰의 수사 내용, 재판 당시의 워딩, 심리분석까지 개별 사건에 대해 비교적 세부적인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분석한 내용을 바탕으로 제시한 전락에 이르는 8가지 특징은, 일반적인 수사과정에서 매우 있을 법한 흔항 상황이어서 마음이 아팠다. 특히 '상처받기 쉬운 사람들'로 제시한 사회적 약자들의 경우. 수사를 받는 일 자체를 견뎌내지 못할 것 같았다.

책을 읽는 내내 압도적으로 느껴지는 감정은 분통함이나 한심함이지만 의외로 놀라움도 자주 느꼈다. 우리나라보다도 일본의 사법 체계에 구멍이 많다는 점을 처음 알게 됐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일본에서 사용한다는 '독백체 조서'는 정말 문제가 많아 보였다. 가장 좋은 기록 형식은 문과 답이 워딩 그대로 낱낱히 적혀 있는 형식일 것이다. 조사 과정에서의 모든 상화이 담길 수 있으니까. 이걸 다시 용의자가 독백하는 형식으로 정리하는 건, 일도 일대로 번거롭고, 그 사이에 '편집'의 여지가 너무 많이 들어간다. 그런데도 일본은 그 방식을 고수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다.
조사 과정에서 변호인을 대동할 수 없다는 점도 그랬다. 책에서는 이부분을 언급하면서 우리나라 얘기를 꺼낸다. 한국조차도!!! 변호인을 대동할 수 있다고...

수사 과정의 강압과, 허술한 증거 등에 힘입어 죄인이 됐던 원죄의 피해자들은 대개 진범의 체포가 계기가 되어 재심과정을 이어간다. 재심에서는 수사 과정의 부당한 내용이 드러나거나 수년 전보다 발달한 과학수사기법이 증거 분석의 정확도를 높이는 식으로 진실에 다가간다.
없던 일이 된다 한들, 없던 일이 될 수 없는 그런 채로 피해자들은 자유의 몸이 된다.
이런 일본의 유죄율이 무려 99.9%에 달한다니. 아마도 아직 밝혀지지 않은 진실이 많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어떨까. 과거사 관련 사건은 일단 차치하고서라도 대표적으로는 친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로 15년동안 무기수로 복역하고 있는 김신혜씨의 재심 청구가 있다. 지난해 11월 받아들여졌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8&aid=0002307086)
유죄율도 일본과 큰 차이가 없고, 재심이 받아들여지는 과정도 깐깐하다고 말이 많았다. 서영교의원은 얼마전 재심 제도 문턱을 낮추는 '김신혜법'을 발의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8&aid=0003627854)

깊이 생각해봤으면 하고, 언젠가 기사로 다뤄보고 싶은 문제다. 
읽으면서는 온갖 잡다한 생각이 많이 떠올랐었는데. 또 뒤늦게 돌이키다 보니 기억이 흐릿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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