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의 재발견, 앨러스테어 보네트

장소의 재발견

앨러스테어보네트/박중서옮김/책읽는수요일


아랄쿰 사막

시랜드

북센티넬 섬


대부분의 현대 지식인들과 과학자들은 자신의 이론이 세상 어디에나 적용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장소에 대해서 관심을 거의 기울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장소는 강등되고 추방되었으며, 급기야 약간은 우쭐대고 적당히 추상적인 지리학상의 경쟁자인 '공간space'의 개념이 대두하면서 이런 강등과 추방의 과정은 더욱 촉진되었다.
...
장소에 가득한 분주함과 기묘함에 직면했을 때 현대사회가 보이는 반응이란, 그 장소를 곧게 펴고 합리화하는 것이었으며, 또한 관계를 우선시하고 장애물을 지우는 것이었고, 나아가 공간으로 장소를 극복하는 것이었다.
p.7-8


장소는 이른바 인간이 된다는 것의 변화무쌍하고도 근본적인 측면이다. 우리는 장소를 만들고 장소를 사랑하는 종(種)이다.
p.9


오늘날 우리는 '이 세계는 완전하게 가시적이고 철저하게 알려져 있다'는 기대를 품고 살아가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리의 상상력이 구애받지 않고 배회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장소'를 원하고 또 필요로 한다. 신비하고 놀랄 만한 장소들은 지리학적 상상력의 피난처이다. 즉, 지난 2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만들어진 '만물을 통찰하는' 해도에 저항하는 일종의 요새인 것이다.
p.26


많은 도시가 여전히 배우고 있는 것처럼, 과거를 싹 쓸어 없애버리는 일은 단순히 희귀하고 아름다운 경관을 이 세계에서 앗아가는 것만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제거 과정에서 사람들을 함께 엮어주던 갖가지 기억, 이야기, 관계들도 없어지기 때문이다. 복잡하고 다양한 장소를 천박하고 단순한 장소로 바꿔놓다 보면, 그로 인해 문화적으로 더 취약해진 인구가, 즉 뿌리 뽑힌 대중이 생겨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이들을 유일하게 서로 연결해주는 가느다란 실이라고는 누군가 위에서 부여해주는 이데올로기가 유일하다.
p.44


모든 국경은 거부의 행위, 즉 또 다른 나라의 권리를 인정하는 행위가 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국경선을 원하지 않는다는 권리 주장은 전 세계에 대한 권리 주장이기도 하다. 국경선은 영토와 훨신 더 양가적이고 복잡한 관계를 맺는다. 즉 국경선은 고집과 겸손 모두를, 그리고 요구와 거부 모두를 조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p.135


인간이 없는 장소란 역설적이다. 그런 장소는 얼핏 보기에 기능이 없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상당한 권력을 상징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가장 두드러진 사례라면 정치적 목적으로 지어놓은 텅 빈 도시들을 들 수 있지만, 이것 말고도 무력 충돌 때문에 텅 비어버린 장소라든지, 환경 재난으로 인해 텅 비어버린 장소 역시 권력을 상징한다.
p.164


루마니아의 강제수용소 시대는 이미 끝났지만, 그 경험은 이 나라에 물리적이고 문화적인 기반 시설을 모두 남겼다. 전자는 곧 비밀 수용소들의 네트워크이고, 후자는 곧 평범하게 보이는 정부 건물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한 대중의 무관심이었다. 뻔히 보이는데도 못 본 체하는 세상에 둘러싸여, 방향상실한 수감자들이 들어 있는 무레스 거리 4번지야말로, 이른바 손 닿는 범위 너머에 있는 장소의 완벽한 사례였다. 이곳이야말로 오래된 규칙과 오래된 정체성 모두가 깨어지거나 망각되는 비장소였던 것이다.
p.235


오늘날 유토피아의 무장소는 수많은 전초기지를 가지고 있다. 그중 일부는 지나간 희망의 잔재이고 또 일부는 새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이 모두는 탈주와 귀향을 향한 인류의 강력하고 역설적인 갈망을 보여주는 셈이다.
p.258


'제멋대로인 장소들'은 우리의 기대를 박살낼 수 있는, 그리고 지리를 재주술화할 수 있는 힘을 지녔다.
...
잃어버리고 숨어 있는 장소들에서 시작되어, 대개는 우연히 발견된 장소들을 거쳐, 마침내 의도적으로 고안되고 제작된 장소들에 이르는 이 책의 여행은 뭔가를 형성하고 만들어내는 인간의 본능을 따른 것이었다.
p.403



=

'사회지리학'.
지리학이라는 게 이토록 매력적인 학문인지 미처 몰랐다. 번역투가 매끄럽지 않은 건지 문장이 원체 좀 번잡스러운건지 모르겠지만 쉽게 읽히지 않았는데도 마구 빨려들었다. '공간'과 '장소'의 개념을 완벽히 분리하고 그들 사이의 철학적 차이와 구분, 관계를 정의하는 서론부터 마음에 들었다.

이 책은 잃어버린 곳, 숨어 있는 곳, 주인 없는 땅, 죽은 도시, 예외의 장소, 고립 영토와 분열 국가, 떠 있는 섬, 일시적 장소 이렇게 8개 장에 걸쳐 세계 곳곳의 47개 장소를 소개한다.
뉴 무어 섬, 아랄쿰 사막, 젤레즈노고르스크, 노스 센티널 섬, 캉바시, 호비오, 시랜드 등 흥미 진진한 장소들이 잔뜩 튀어나온다.
들어본 곳도 있었지만 깊이 알고 있지 않은 곳들이 많았다. 그런 특별한 장소의 역사와 배경, 오늘을 낱낱이 설명해준다. 지리학보다는 인문학에 가깝게 여겨지는 이유다.

잃었거나 숨겨진 곳, 죽은 곳, 찢기고 갈린 곳, 영원하지 못할 곳, 거의 대부분이 인간의 욕심과 얽혀 있었다. 한없이 많은 장소들, 신비로운 지구 위에서 인간은 한낱 미물에 불과하다는 점도 피부로 다가왔다. 그래서인지 책을 읽는 내내 아득한 장소를 향해 두근거리면서도 조금은 슬픈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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