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혁명

나는 꽤나 고리타분하고 보수적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보수적이라는 말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지만 우리집, 적어도 가장인 우리 아빠만큼은 어느 모로 보나 그 단어에서 자유롭지 못한 분이다. 방학이라 탱자탱자 노는 남동생과 간만의 휴일을 맞아 늦잠을 자는 내가 함께 집에 있다면 밥상을 차리고 치우는 일은 내 몫인 게 '당연하다'. 그게 우리 아빠 철학이다. 내가 누나이기 때문이고, 더 본질적으로는 여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문제가 아니더라도 아빠와 다툴 일은 수두룩하기 때문에 대개는 '순리'에 따르곤 한다. 그래도 불쑥불쑥 내 안의 뜨거운 무언가가 들끓어오르는 날은 어쩔수 없다. '반항'을 할 수밖에. 그 순리라는 것이 분명히 부당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여성학 수업한번 제대로 들어보지 않은 채 여대를 졸업한 뒤 이런 저런 잡다한 지식을 더듬어 '페미니즘'을 이해해가는 내 짧은 식견에도 그랬다. 반항에는 아빠의 꾸중이 뒤따랐다.

아빠의 순리는 명절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고종사촌 형부까지 명절마다 스무명 가까이 모여드는 우리집에서 식사준비와 뒷정리는 거진 다 여자들 몫이다. 엄마, 작은엄마, 사촌언니들, 나. 그중에서도 많은 부분이 꾀부릴 줄 모르는 맏며느리 우리 엄마 몫이다. 남자들이 하는 거라곤 상 꺼내 닦기, 다 먹은 상 부억 쪽으로 들어나르기, 무거운 과일 상자 받아들기, 음...더 생각해내려 했는데 여기까지다.

너댓세트의 밥상을 전부 차려내고 자리에 앉아 마침내 수저를 들면 아빠가 앉은 어른 상을 시작으로 주문이 밀려든다. 이 대목도 언짢다. 2016년에 유교적 서열에 입각한 자리 배치라니! 무튼 "초고추장이 떨어졌어" "갈비좀 더" "물 없나" "뿅각이 밥좀 더 줘" 이런 소리마다 여자들이 몸을 일으켜세우지만 매번 우리 엄마가 제일 빠르다. 엄마는 밥을 먹는둥마는둥 계속 영업 중인 상태가 된다. 물론 나도.

여기에 나를 향한 '결혼독촉'이 본격화된게 화근이었다. 나이 순으로라면 고종사촌 오빠 하나, 언니 하나가 남아있어서 내게 화살이 날아들 때가 못되었지만 아빠가 큰아들이라 얘기가 달라졌다. 다들 빨리 시집을 가버리라고 아우성인 것이다. 헬조선 국민의 숙명, 명절 훈수 뫼비우스의 띠는 좀체 끊어질 줄을 몰랐다. 대학에 갔고 졸업을 하고 취업도 했으니 응당 시집을 가야 한다는 뭐 그런 흔한 참견.

나는 사뭇 진지하고 엄중하게 "시집 가기 싫다"고 선언해버렸다. 부엌 입구에서 멀리 아빠가 앉은 자리까지 또렷하게 들리도록 큰 목소리로. 이유로는 지금 이 순간 우리집 명절 풍경을 들었다. 이런 고생을 뭐하러 사서 하냐고, n포세대니 집값이니, 사교육비니 하는 뉴스 얘기를 주문처럼 외웠다. 좋은 시댁 만나 남자들이 명절 집안일을 도맡는 고종사촌 언니 둘이 목소리를 보탰다. 우리집 미혼 남성들 장가 가려면 어려울 거라는 전망도 내놨다.

이번 설 연휴가 특별해진건 그때였다. 2016년 2월 7일, 시간은 아마도 오후 8시쯤. 반항이 혁명으로 거듭난 역사적인 순간이랄까. 내 선언을 들은 아빠 표정이 잠시 심각해지더니 이내 멋쩍은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그래. 오늘 설거지는 남자들이 해라." 희비가 엇갈리는 순간이었다. 20인분의 9첩반상 설거지는 세명이 달라붙어야 1시간이 걸릴까 말까한 그런 규모니까.

결국 패색이 짙은 내 동생과 사촌남동생아 고무장갑을 꼈다. 걔들이 불안해서 난 부엌을 떠나지 못하고 결국 다 씻은 그릇 닦아 제자리에 두기 역할을 맡으며 관리감독을 했다. 덜 씻긴 그릇이 서너개정도 나오긴 했지만 그런대로 괜찮게 동생들이 설거지를 마쳤다. 남은 반찬 정리와 설거지를 모두 여자들이 할 때보다 한결 빠른 마무리였다.

작은 승리였다. 지속가능성은 불투명하지만. 이 맛에 시대의 현인들이 혁명을 하고 투쟁을 하고 바꾸고 뒤집고 하는 건가 하는 어설픈 전율이 느껴졌다. 이런 작은 변화에도 분명 나와 우리집 여자들은 대부분의 집안일을 짊어지게 될 것이다. 어디까지가 평등인지, 협업인지, 정당함인지를 안팎으로 고민하고 갈등하며 남은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를 작은 혁명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시작이 반이란 말에 기대를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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