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팔로 하는 포옹, 김중혁

가짜 팔로 하는 포옹

김중혁/문학동네



모든 창문에는 비밀이 있었고, 기민지는 그 비밀이 늘 부러웠다. 비밀을 가질 수만 있다면 누군가 바깥에서 자신의 창문으로 돌을 던져도 상관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벽을 쌓는 것보다 창문을 만들기가 훨씬 어려웠다.
p.87 <픽포켓>

류영선의 마음은 이미 김우재에게 가있었다. 가 있는 마음을 가져오려면 많은 걸 잃을 것이다. 잃는 게 무엇일지 하나하나 따져보고서 정민철은 류영선을 포기했다.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포기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정민철은 '포기'라는 단어를 생각했고, 소리내어 발음해보기도 했다. '포기'라는 발음에서 쏟아져나오는 한숨은 정민철의 마음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p.134 <뱀들이 있어>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들의 설렘에는 앞날에 대한 기대가 들어있다. 설레며 고백하는 사람은 앞에 앉은 사람과 겪게 될 수많은 경험을 짐작하고 떠올리며 미리 행복해한다. 막연한 기대는 꿈꾸는 사람의 특권이다. 다가올 시간을 가늠해보는 일, 행복이라는 덩어리의 무게를 미리 재어보는 일, 그게 사랑의 시작일 것이다. 
p.222 <보트가 가는 곳>

시계 조립에 익숙해지자 차선재는 마치 자신이 시간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빠졌다. 분침을 빨리 움직여서 시침을 움직이게 만들고 시침을 빨리 움직이게 만들어서 20년 후를 만들고 싶었다. 20년 후에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그때도 폐허 위에 서 있을까. 그때도 여전히 관계를 부수는 사람일까. 시계를 거꾸로 돌려 태어나기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기도 했다. 그렇게 시계를 한없이 거꾸로 돌려서 모든 게 존재하지 않았던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p.269 

가까워지고 다시 멀어지고 다시 가까워지는 시간. 영원을 향해 직선으로 흐르지만 다시 돌아오는, 요요의 시간으로 하자. 그래, 나쁘지 않아. 나쁘지 않아. 돌아갈 수는 없지만 그 시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나쁘지 않아. 
p.300 <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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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기발했던 이야기는 보트가 가는 곳. 악몽으로나 꿔볼 법한, 이토 준지 만화같기도 한 이야기인데 그 안에서 사랑이 피어나고 저무는 과정이 담겼다. 
시계라는 물건과 시간이라는 개념의 관계를 곱씹어볼 수 있던 요요도 좋았다. 엇갈려버린 풋풋한 첫사랑 이야기들의 클리셰를 답습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몇몇 이야기들은 이게 왜 사랑이야기인지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잔상을 곱씹을수록 슬며시 찾아드는 감상들이 있었다. 
결국 어떤 형태로든, 전부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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