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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분간 이사

구글 블로그에 동영상을 올리는 방법이 너무나도 번거로운 관계로 여행기를 쓰는 동안 브런치로 이사하기로했다. 다시 돌아올지 말지, 아마 여행기 작성이 끝나면 정해질 것 같다. 잠시 안녕! https://brunch.co.kr/@suminism

프롤로그: 아름다운 이별, 모험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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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바다를 향해 맹렬한 기세로 달려들어가는 물개. 퇴사한 나를 닮았다고나 할까.  20170628, San Christobal Island , Galapagos, Ecuador 사랑했다. 그것도 꽤 열렬히. 이유라면 이유라 할 것들이 있었지만, 돌이켜보니 그냥 좋았던 것 같다. 막연한 환상이나 무지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20대 초반이면 중요한 결정을 하기엔 퍽 어린 시기이니까. 당시의 열정은 맹목적이었다. 한 눈 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수차례 거절당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도전했다. 부족한 내 탓도, 피치 못할 상황 탓도 해 봤다. 끝끝내 받아들여진 건 한 해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그토록 원하던 자리에서 분명 날아갈 것처럼 기쁜 날들이 있었다. 매일이 새롭고 설렜다. 죽을 만큼 힘든 순간도 있었지만 버텼다. 그럴 수 있었다. 푹 빠져서 허우적댈 때는 정신이 하나도 없는 법이니까. 그러나 한 해 두 해 세월이 쌓일수록 차츰 모든 것에 익숙해졌다. 또 시들해졌다. 기쁜 날들만큼 괴로운 날들이 생겨났고, 나도 모르는 어느 순간 역전이 일어났다. 마음속에서는 잡다한 의문들이 꿈틀거렸다. 나는 잘 하고 있는 걸까. 나는 좋은 사람일까. 나는 여기 적합한 사람일까. 나는 누구일까. 나는 무엇이 되어 가고 있는 걸까.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삶이 최선일까. 뜨거움이 시나브로 사라져 가는 것 같았다. 초심이 제 빛을 잃은 건 아마도 그 공허하고 울적한 물음표들 사이 어디쯤부터였을 것이다. 아프리카 대륙을 벗어나기 전에 올려다 봤던 하늘. 꽃나무가 참 예뻤다. 한국을 떠날 때의 푸르른 가로수 만큼이나. 20170823, Victoria Falls, Zimbabwe 오랫동안 전부라고 믿었던 것들과 서먹해지자 삶은 정물 같기만 했다. 어쩌면 그게 대다수의 성숙한 어른들이 짊어지고 살아가는 생활이자 일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 봤다. 그래도 아프고 슬픈 건 어쩔 수 없었다. 문득 내가 커다란 갈림길 앞에서 대개 안주를

편리를 포기할 각오는 됐나요

편리를 포기할 각오는 됐나요 문이 열리자마자 후끈한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더 이상 발 디딜 틈 하나 없어 보이는 안쪽을 향해 기어코 네댓 명이 몸을 욱여넣었다. 옷자락만큼 구겨진 얼굴들이 무언가를 보고는 이내 더 찌푸려진다. 전동휠체어다. 출근길 만원 전철 한 구석에 그게 있었다. 휠체어 위에는 모자를 푹 눌러쓴 노년의 남성이 좀처럼 알 수 없는 표정을 한 채 정물처럼 앉아 있었다. 열차가 흔들릴 때마다 사람들은 자꾸만 그의 머리 위로 휘청거렸다. 그리고 그를 힐끔거렸다. 환승역에 다다르자 밀치듯 빠져나가는 인파 사이에서 그는 꽤나 불안해보였으며 사람들은 살짝 불편해했다. 목적지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편리와 효율이 조금 위협받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을까. 불의에는 눈을 쉽게 감고, 불편에는 눈에 불을 켠다. 그게 남들보다 수월하게 사는 비결이라고 세상은 가르친다. 거부감 없이 수용하는 것은 그저 적당한 불편이다. 소문난 맛집이라면 삼복더위에도 한 시간 넘게 줄지어 기다릴 줄 안다. 텃밭에서 찬거리를 직접 키우거나, 채식주의자를 자처한다. 2G폰으로 돌아가기도, TV를 없애기도 한다. 김용섭 칼럼니스트는 저서 ‘라이프 트렌드 2017-적당한 불편’에 ‘적당한 불편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트렌드는 소비의 진화이자 소비자의 성숙’이라고 적었다. 그러나 적당한 불편은 대개 나를 위한 마음에서 시작된다. 나의 미각을 위해 줄을 서고, 나의 건강을 위해 기르고 걸러 먹는다. 내 피로를 덜고자 ‘연결되지 않을 권리’를 찾는다. 반면 적당하지 않은 불편은 이타적인 속성을 지닌다. 환경을 위해 분리수거를 하거나 텀블러를 쓰고, 필요한 이들을 위해 노약자석을 비워 두는 행동들이 그렇다. 준법 역시 불편 감수에 기초한다. 영국의 신학자 리처드 후커는 “불편함 없이는 변화도 없다. 더 나은 방향으로의 변화도 마찬가지다”라는 말을 남겼다. 견뎌야 할 불편도 습관이 들면 당연해진다. 내가 더 가져서, 더 잘나서가 아니다. 나만이 아니라 다 같이 행복하기 위해 당연하게 누려 왔던 것들

김민정,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김민정 지지난 겨울 경북 울진에서 돌을 주웠다 닭장 속에서 달걀을 꺼내듯 너는 조심스럽게 돌을 집어들었다 속살을 발리고 난 대게 다리 두 개가 V자 안테나처럼 돌의 양옆 모래 속에 꽂혀 있었다 눈사람의 몸통 같은 돌이었다 야호 하고 만세를 부르는 돌이었다 물을 채운 은빛 대야 속에 돌을 담그고 들여다보며 며칠을 지냈는가 하면 물을 버린 은빛 대야 속에 돌을 놔두고 들여다보며 며칠을 지내기도 했다 먹빛이었다가 흰빛이었다가 밤이었다가 낮이었다가 사과 쪼개듯 시간을 반토막 낼 줄 아는 유일한 칼날이 실은 돌이었다 필요할 땐 주먹처럼 쥐라던 돌이었다 네게 던져진 적은 없으나 네게 물려본 적은 있는 돌이었다 제모로 면도가 불필요해진 턱주가리처럼 밋밋한 남성성을 오래 쓰다듬게 해서 물이 나오게도 하는 돌이었다 한창때의 울이들이라면 없을 수 없는 물이잖아, 안 그래 물은 죽은 사람이 하고 있는 얼굴을 몰라서 해도 해도 영 개운해질 수가 없는 게 세수라며 돌 위에 세숫비누를 올려둔 건 너였다 김을 담을 플라스틱 밀폐용기 뚜껑 위에 김이 나갈까 돌을 얹어둔 건 나였다 돌의 쓰임을 두고 머리를 맞대던 순간이  그러고 보면 사랑이었다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문학동네 = 단지 제목에 이끌려 산 시집이었다. 이렇게 쉽게 시를 쓰나 싶기도 했고, 그래서 더 어렵게 느껴지기도 했다.  장난치듯 늘어놓은 일상의 조각들 틈바구니에서 간혹 싸르르한 시구들이 마음에 와닿았다. 

트루먼쇼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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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먼 쇼 The Truman Show, 1998 코미디 ,  드라마 ,  SF   미국   103분   1998   .10.24  개봉 피터 위어 짐 캐리 (트루먼 버뱅크) We've become bored with watching actors give us phony emotions. We are tired of pyrotechnics and special effects. While the world he inhabits is, in some respects, counterfeit, there's nothing fake about Truman himself. No scripts, no cue cards. It isn't always Shakespeare, but it's genuine. It's a life. I know you better than you know yourself. You never had a camera in my head! Why do you think that Truman has never come close to discovering the true nature of his world until now? We accept the reality of the world with which we're presented. It's as simple as that. Who are you? I am the Creator-of a television show that gives hope and joy and inspiration to millions.  Then who am I? You're the star. Was nothing real? You were real. That's what mad you so good to watch.

어느 작가의 오후, 페터 한트케

어느 작가의 오후 페터 한트케 지음/홍성광 옮김/열린책들 언젠가, 거의 1년 동안 언어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며 살았던 이래로 작가에게는 자신이 과거에 썼고, 앞으로 쓸 수 있다고 느낀 문장 모두가 하나의 사건이 되었다. 말로 표현되지 왆고 글로 쓰이면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모든 언어가 그로 하여금 깊이 숨을 쉬게 했고, 그를 세계와 새롭게 맺어 주었다. p.11 예로부터 작가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밖에 있을 때 바로 제자리에 있다고 느꼈다는 것은 특이한 일이다. p.15 펜을 눌러 쓴 것, 펜의 이중(二重)의 교미욕, 잉크가 튄 얼룩에서 뚜렷이 드러나는 격렬한 긴장. 종이는 늘 새롭게, 번번이, 헛되이 공격당하는 것 같았다. p.79 처음 글을 쓸 때 나는 내 안에 있는 세계를 상(像)들의 신뢰할 수 있는 연속으로 생각했다오. 나는 그 상들을 바라보고, 하나하나 묘사하기만 하면 되었지.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상들의 윤곽이 흐릿해졌고, 나는 나 자신을 들여다보고, 또 귀 기울여 듣게 됐다오. p.106 그런데 말이야,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기만의 텍스트가 있는데 나만 빈손인 거야. 그런 상황에서 완전히 무감각한 문장으로 이미지도 리듬도 없이 꿈이 끝나 버렸을 때 나는 영원히 글스기를 금지당한 것으로 받아들였다오. 더 이상 자기 텍스트를 가져서는 안 된다! p.108 나는 소설의 형식으로 시작했다! 계속한다. 그대로 놓아둔다. 반대하지 않는다. 서술한다. 전해 준다. 소재들의 가장 피상적인 부분을 계속 가공하고, 그 숨결을 느끼며, 그것을 다듬는 자가 되고자 한다. p.121 = 쓴다는 행위의 고통과 번뇌에 대한 이야기. 글쓰기라는 고요하고 열정적인 행위에 몰두하는 작가의 곁에서 그저 고요하게 흘러가는 일상들을 만났다.

인도 야상곡, 안토니오 타부키

인도 야상곡 안토니오 타부키 지음/박상진 번역/문학동네 나는 축구장처럼 넓은 로비 한가운데에 놓인 소파에 몸을 묻고서 호화로운 주위를 바라보았다. 바라본다는 순수한 행위 속에는 언제나 약간의 사디즘이 있다고 누가 말했던가. 생각을 했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말에는 뭔가 진실한 것이 들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기에 나는 더 흡족한 마음으로 둘러보았다. 몸은 어떤 다른 곳, 어딘지 알지 못하는 곳에 있지만, 바라보는 두 눈만큼은 완벽하게 감각을 가동시킨다는 생각이었다. p.40 "인간의 육체는 그저 외양에 지나지 않을 겁니다." 그가 말했다. "그것은 우리의 실재를 가리고, 우리의 빛이나 우리의 그림자를 덧칠해버립니다." ... 무엇을 위한 건배인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도 따라서 잔을 들며 말했다. "빛과 그림자를 위하여." p.56 "눈먼 과학은 볼모의 땅을 일구지요. 미친 믿음은 자기를 찬미하는 꿈을 먹고 삽니다. 새로운 신은 그저 하나의 말일 뿐입니다. 찾지도 말고 믿지도 마세요. 모든 건 감춰져 있습니다." p.64 산다는 건 그냥 우연이다. p.94 아마 어떤 과거, 뭔가에 대한 어떤 대답을 찾나봅니다. 옛날에 잃어버린 어떤 것을 움켜잡고 싶은 거겠지요. 어쨌든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을 찾고 있어요. 말하자면 마치 자기 자신을 찾는 것처럼 나를 찾고 있는 겁니다. 책들을 보면 그런 일은 숱하게 일어나지요. 그게 문학입니다. p.108 확대는 맥락을 변조하지요. 사물은 멀리서 봐야 해요. 선택된 부분은 신중히 보시기 바랍니다. p.115 = 어딘가 몽환적이고, 나른한 여행을 다녀온 기분. 덧없고 덧없다.

평범함의 난이도

평범함의 난이도 뛰어나거나 색다른 점이 없이 보통이다. 누군가 당신을 두고 이런 말을 한다. 여러 가지 생각이 들 수 있겠다. 크게는 두 갈래로 나뉠 것이다. 조금은 섭섭하거나,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리게 되거나. 잘난 것도 특별한 것도 없이 흔하다는 것, 곧 당신이 평범하다는 얘기다. ‘뛰어나거나 색다른 점이 없이 보통이다’라는 문장은 형용사 ‘평범하다’의 뜻풀이다. 정의가 딱 한 줄일 뿐인 이 간단한 단어를 두고 저마다 각기 다른 모양새로, 평생 사투를 벌인다. 평범함에 대한 모순적인 욕망과 압력 때문이다. “우리 아들은 말이 유독 빨랐어.” “우리 딸은 한번 가본 길을 전부 기억하더라고.” 모든 아기들이 각양의 방식으로 비범하다. 탄생의 순간부터 자라는 내내 무엇인가 특출할수록 좋다. 상당수는 영재가 아닐까 하는 기분 좋은 오해도 받는다. 뭐라도 남다르기를 처음에는 부모가 원하고, 결국에는 자신이 한동안 바란다. 저마다 이것저것 시도하고 부단히 노력한다. 비범함을 동경해서다. 평범함은 겉보기에 누구나 갖고 있는 것 같은 특성이다. 뭇 사람들보다 더 나은 걸 누리리라 다짐하는 이들이 한때 그 소박한 축복을 얕보는 이유다. 그러나 특별해지겠다는 결심은 주류(主流)의 존재를 알게 되는 무렵부터 흔들리기 십상이다.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여기는 주류의 작동원리와 비범함의 본질이 부딪히기 때문이다. 충돌의 여파로 복잡한 욕망이 생겨난다. 주류에 속하면서도 조금 더 잘되고 싶은, 월등하게 평범하겠다는 의지 같은 것 말이다. 남들만큼은 해야만 할 과업들이 최후 방어선처럼 거기서 하나둘 늘어난다. 학교를 마치고, 대학에 가고, 연애를 하고, 직장을 구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며 늙어가는 것. 남들처럼, 평범하게. 비범한 사람들은 더욱 고되고 극히 일부만 평범 이상에 간신히 이르더라는 풍문이 두런거리며 맞장구친다. 은근한 폭력이다. 대부분 사람은 세상의 아우성을 못이기는 척 일단 평범해보기로 작정하게 된다. 진짜 전쟁도 그때부터 시작이다. 별

믿는다는 것

믿는다는 것 “사랑하는 XX이에게. … 내년에도 부모님 말씀 잘 듣고 동생과 잘 지내야 한다. 산타 할아버지가.” 산타클로스의 편지를 크리스마스가 오기 전에 발견해버렸다. 그것도 아빠 책상서랍에서. 편지 속 글씨는 아무리 봐도 책상 위 메모지에 적힌 아빠 것과 모양이 같았다. 얼얼함이 정수리부터 심장을 관통해 발끝까지 찌르르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아빠 책상이나 뒤적거리는 못된 애를 급습한 벌이었나보다. 내 탓이다. 하나님, 예수님과 무슨 사이인지, 천사인지 사람인지, 왜 할머니는 없는지, 산타에 대해 누구도 속 시원히 알려주지 않았는데 내가 그를 믿었다. 그래서 속았다. 기억 속에 각인된 최초의 배신이다. 여덟 살짜리 마음에는 퍽 강렬한 충격이었다. 지금도 그 편지 속 파란 활자들이 눈에 선하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된 ‘믿다’라는 단어의 첫 풀이는 이렇다. ‘어떤 사실이나 말을 꼭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그렇다고 여기다.’ 마지막에는 ‘어떤 사람이나 대상을 아무 의심 없이 다른 무엇이라고 여기다’라고 적혀 있다. ‘꼭 그렇게 될 것’, ‘아무 의심 없이’라는 표현이 선포하듯 믿음은 순도 100%의 마음이다. 믿거나, 말거나이다. 다만 믿음의 경도는 제각각이다. 작은 외부 충격에 틈을 드러내는 믿음이 있고, 온 세상이 무너지는데 꿈쩍 않는 믿음도 있다. 믿음이 깨질 때는 늘 단단함에 비례하는 통증이 찾아온다. 어른이 되는 것은 곧 조리 있게 의심하는 법을 훈련하는 일이었다. 내게 맞닿은 세상이 넓어질수록 기만과 배신의 경험은 차곡차곡 쌓였다. 그때마다 속절없이 크고 작은 마음의 성장통을 앓았다. 노력하면 된다고 믿었는데 안 되는 일들이 숱했다. 의인은 상을, 악인은 벌을 받는다는 믿음이 종종 통하지 않았다. 사람을, 시스템을 쉽게 믿어선 안 됐다. 기자가 된 뒤 허다한 믿음이 엎어지는 광경을 곳곳에서 더 생생하게 목격했다. 보금자리라 믿던 곳에서 가정폭력으로 죽어나간 이들이 있었고, ‘서울중앙지검’을 사칭한 전화에 속아 전 재산을 잃

수(數)의 독재

수(數)의 독재 뇌의 어느 한 구석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 같다는 의심을 한 지 오래다. 두정엽(頭頂葉), 아마 여기 문제인가 보다. 정수리에서 뒤통수로 넘어가는 길목쯤에 있는 뇌의 이 부분이 맡은 역할 중 하나가 수학적 사고력이라고 한다. 나는 수학이 괴롭다. 요즘 말로 ‘수알못’(수학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학문 영역까지 갈 필요도 없다. 숫자가 싫다. 수(數)가 싫다. 이 감정은 자주 호오(好惡)의 경계를 넘어 공포로 내달린다. 고작 0부터 9까지 기호 열 개의 조합일 뿐인데, 제멋대로 뒤엉켜 있는 숫자들을 보면 가슴 한 구석이 묵직하고 번뜩 눈앞이 캄캄한 게 꽤 아찔하다. 피치 못하게 숫자를 접할 때면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고 애를 쓰지만 소용은 없는 편이다. 취재 과정에서 다뤄야 할 숫자가 세 자리를 넘어가면 꼭 몇 번은 다시 들여다봐야 한다. 통계를 바탕으로 기사를 쓸 때는 여러 번 계산기를 두드리고 엑셀과 씨름한 뒤에도 마음이 편치 않다.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귀결되는 일이 잦다. ‘숫자에 트라우마가 있다’고 기회 될 때마다 미리 앓는 소리를 해 둔다. 트라우마의 역사는 중학교 2학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특출난 재능이 없으니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수학과 좀처럼 맞지 않았다. ‘수포자’(수학을 포기한 자)가 될 뻔했다. 그래도 대학에 가려고 버텼다. 막상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는 수학 답안지까지 살짝 밀려 썼다. 재수는 안 했다. 수학을 더 하는 걸 견딜 수 없었다. 그 뒤로 수와 최대한 멀어지고자 발버둥쳤다. 취업에 중요하다는 경제학이나 경영학은 한 과목도 듣지 않았다. 동생이 수학 문제를 알려달라고 하면 방문을 걸어 잠갔다. 시급이 아무리 높아도 수학과외보다는 콜센터 아르바이트가 편했다. 기자가 되기로 결심하고는 내심 안도했다. 언론사 입사 시험은 기업 입사 시험처럼 숫자들의 상관관계나 규칙 따위를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른이 될수록 점점 더 수 앞에서 무기력한 나를 발견하게 된다. 나이, 키, 몸무게

이제니, 밤의 공벌레

밤의 공벌레 이제니  온 힘을 다해 살아내지 않기로 했다. 꽃이 지는 것을 보고 알았다. 기절하지 않으려고 눈동자를 깜빡였다. 한 번으로 부족해 두 번 깜빡였다. 너는 긴 인생을 틀린 맞춤법으로 살았고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었다. 이 삶이 시계라면 나는 바늘을 부러뜨릴 테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하염없이 얼음을 지칠 테다. 지칠 때까지 지치고 밥을 먹을 테다. 한 그릇이 부족하면 두 그릇을 먹는다. 해가 떠오른다. 꽃이 핀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 울고 싶은 기분이 든다. 누구에게도 말 못하고 주기도문을 외우는 음독의 시간. 지금이 몇 시일까. 왕만두 찐빵이 먹고 싶다. 나발을 불며 지나가는 밤의 공벌레야. 여전히 너도 그늘이구나. 온 힘을 다해 살아내지 않기로 했다. 죽었던 나무가 살아나는 것을 보고 알았다. 틀린 맞춤법을 호주머니에서 꺼냈다. 부끄러움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아프리카>, 창비2010 = 밤이라는 시간들에 흠뻑 젖은 채 찾아오는 차갑고도 뜨거운 감성. 거기서 촉발되는 낯설게 익숙한 의식의 흐름. 어느 순간에선가 나도 모르게 위로를 받았다.  오늘도 괜히 잠이 오지 않아서 이 시를 옮겨적는다. 

2017 제8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2017 제8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임현 외 6인/문학동네 1. <고두(叩頭)>, 임현 모든 이타적인 행동에는 이기적인 의도가 숨어 있단다. p.10 *작가노트-두고두고 애매한 것들과 더불어, 선명하게 나쁜 것을 색출해내는 일만큼 복잡하게 나쁜 것을 감각해야 할 또다른 이유 중 하나는 분명하게 슬픈 사람들 사이에 민감하게 아픈 사람들도 있다는 점. 모호하게 다친 사람에게는 다른 종류의 위로가 필요하다는 점. p.40 3. <문상>, 김금희 송 역시 그 일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마음이 난폭해지곤 했다. 그것은 실체가 있는 대상이 아니라 실체는 없지만 힘은 가지고 있는 무언가를 향한 것이었다. 이를테면 바람, 막 출발한 동대구행 KTX가 달리면서 일으키는 이 광포한 바람, 흩날리는, 승강장 사람들의 머리카락과 현수막, 그리고 바람이 멈춘 뒤 찾아오는 정적 사이에서 느껴지는, 살아 있다는 것. 진행되지만 실감할 수 없는 그것을 모멸하고 난폭하게 굴고 싶은 마음. p.95 송은 희극배우가 확실히 나쁘다고 생각했다. 왜 나쁘냐면 지운 흔적이 없기 때문이다. 뭔가 옛일을 완전히 매듭짓고 끝내고 다음의 날들로 옮겨온 흔적이 없었다. 그의 날들은 그냥 과거와 과거가 이어져서 과거의 나쁨이 오늘의 나쁨으로 이어지고 그 나쁨이 계속되고 계속되는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어떤 선택을 하든지 어차피 나빠질 운명인 것이다. 선택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실패가 선택되는 것이다. p.107 *작가노트-더이상 나쁘지 않은 날들 소설을 읽는다는 건 누군가의 '나쁨'에 대한 지겨운 고백을 듣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울어야 할 일과 절대 울고 싶지 않은 일, 되돌려주고 싶은 모욕과 부끄러움, 한순간 광포한 것으로 변해버리는 환멸과 후회들이 차창 밖처럼 연속된다. 나는 누구나 아주 나빠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고 믿고 나 역시 마찬가지이지만 한계도 있을 것이다. p.119 4. <고요한 사건>,

가짜 팔로 하는 포옹, 김중혁

가짜 팔로 하는 포옹 김중혁/문학동네 모든 창문에는 비밀이 있었고, 기민지는 그 비밀이 늘 부러웠다. 비밀을 가질 수만 있다면 누군가 바깥에서 자신의 창문으로 돌을 던져도 상관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벽을 쌓는 것보다 창문을 만들기가 훨씬 어려웠다. p.87 <픽포켓> 류영선의 마음은 이미 김우재에게 가있었다. 가 있는 마음을 가져오려면 많은 걸 잃을 것이다. 잃는 게 무엇일지 하나하나 따져보고서 정민철은 류영선을 포기했다.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포기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정민철은 '포기'라는 단어를 생각했고, 소리내어 발음해보기도 했다. '포기'라는 발음에서 쏟아져나오는 한숨은 정민철의 마음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p.134 <뱀들이 있어>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들의 설렘에는 앞날에 대한 기대가 들어있다. 설레며 고백하는 사람은 앞에 앉은 사람과 겪게 될 수많은 경험을 짐작하고 떠올리며 미리 행복해한다. 막연한 기대는 꿈꾸는 사람의 특권이다. 다가올 시간을 가늠해보는 일, 행복이라는 덩어리의 무게를 미리 재어보는 일, 그게 사랑의 시작일 것이다.  p.222 <보트가 가는 곳> 시계 조립에 익숙해지자 차선재는 마치 자신이 시간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빠졌다. 분침을 빨리 움직여서 시침을 움직이게 만들고 시침을 빨리 움직이게 만들어서 20년 후를 만들고 싶었다. 20년 후에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그때도 폐허 위에 서 있을까. 그때도 여전히 관계를 부수는 사람일까. 시계를 거꾸로 돌려 태어나기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기도 했다. 그렇게 시계를 한없이 거꾸로 돌려서 모든 게 존재하지 않았던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p.269  가까워지고 다시 멀어지고 다시 가까워지는 시간. 영원을 향해 직선으로 흐르지만 다시 돌아오는, 요요의 시간으로 하자. 그래, 나쁘지

찰리 컨트리맨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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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컨트리맨 The Necessary Death of Charlie Countryman, 2013 코미디 ,  멜로/로맨스 ,  액션 미국 ,  루마니아 103분 2014 .08.28  개봉 프레드릭 본드 샤이아  라보프 ,  에반 레이첼 우드 ,  매즈 미켈슨   Hello gorgeous. Nigel was my husband. I beg your pardon, Gabi, did you say 'was'? Honestly, fucking was?  No, Charlie, not fucking was. Fucking is.  Fucking meaning I currently fucking am 'til death do us fucking part.     He said my playing saved his life. Do you think things like this happen to people? Some people, yes. What people? Us. Us. You're like a wind of shit in my life. I wish you would blow over. No Gabi, we're the pearl! The rest is oyster.   Is it true what they say, Charlie? Better to have loved and lost and all that? Shot poor Charlie for love, did you gorgeous? = 이유 없이 좋은 영화라는 게 정말로 있다. 탄탄한 극본이 아닐 뿐더러 여기저기 빈틈이 보이는 영화인데도 괜시리 가슴이 벅차서 여운이 남았다. 감동의 7할은 적재적소에 배치된 M83, The xx와 Moby 등의 빼어난 음악에서 비롯된다. 사랑

컨택트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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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택트 Arrival, 2016 드라마 ,  SF ,  스릴러 미국 116분 2017 .02.02  개봉 드니 빌뇌브 에이미 아담스 (루이스),  제레미 레너 (이안),  포레스트 휘태커 Memory is a strange thing. It doesn't work like I thought it did.  We are so bound by time, by its order. I remember moments in the middle and this was the end.  But now I'm not so sure I believe in beginnings and endings.  There are days that define your story beyond your life. Like the day they arrived. Language is the foundation of civilization. It is the glue that holds a people together.  It is the first weapon drawn in a conflict. There is a theory that the language you speak determines how you think, how you see everything. Nonlinear Orthography. We need to make sure that they understand the difference between a weapon and a tool. Language is messy and sometimes one can be both. There is no time. Many become one. Weapon opens time. We help humanity. In 3000 years, we

염소가 된 인간, 토머스 트웨이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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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가 된 인간 토머스 트웨이츠 지음/황성원 옮김/책세상 토머스가 염소와 깊게 교감하고 있다. 세상 진지. (출처: 위에 링크한 그의 홈페이지) 알프스 넘는데 성공한 염소 토머스가 산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출처: 마찬가지) 그것은 마치 무리의 선두 근처에 있던 내가 가속기에서 발을 떼고 갓길에 차를 세운 뒤 나무 향에 취했다가 주위를 둘러보니, 갑자기 내가 아는 모든 사람이 중요한 일을 하면서 열심히 지내고 있는데, 난 까마득히 떨어져있고, 이제는 차의 시동도 걸리지 않는 상황과도 같다.  ... 이 세상 모든 사람이 한동안 저 멀리 떠나갔다가 나중에 다시 돌아와서 뒤통수를 치는, 그런 밀물과 썰물처럼 들어왔다가 빠져나가는 자기만의 걱정 보따리 같은 것을 갖고 있을까? p.14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곧 걱정한다는 것이다. p.15 동물에는 의식이 없고, 더욱 근본적으로는 우리 인간의 의식이 물리적인 세계와 독립적이라는 데 있다.  p.58 일단 하이데거는 사고 대상이 존재하지 않고는 사고 자체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그러니까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사실 "나는 무언가에 대해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되어야 한다.  ... 나 자신의 사고에 대한 생각이, 나의 인지된 존재 상태의 여러 측면을 구성하는 생각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p.59 악마는 게으른 손을 위해 일을 찾아낸다. 손을 쓰지 않고 이 세상에 접근하기 시작하면 반드시 머리(그리고 입)부터 세상에 닿게 된다. 이것이 바로 염소의 방식이다. p.138 세프와 리타는 이날 벌어진 일들의 목적에 대해 당연한 호기심을 드러냈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하면서 이 일이 인간으로서의 근심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고 이야기했다. "당신은 도시 출신이잖아요." 세프가 말했다. &

녹터널 애니멀스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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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터널 애니멀스 Nocturnal Animals, 2016 드라마 ,  스릴러 미국 116분 2017 .01.11  개봉 톰 포드 에이미 아담스 (수잔),  제이크 질렌할 (에드워드) For Susan Susan, enjoy the absurdity of our world. It's a lot less painful.  Believe me, our world is a lot less painful than the real world. He's too weak for you. The things you love about him now are the things you'll hate. We all eventually turn into our mothers. REVENGE You're too weak.  Nobody can gets away what you did. Nobody, nobody, nobody.    When you love someone you have to be careful with it. You might never get it again. You can't just walk away from things all the time. I can shoot! = 예술가가 선사할 수 있는 가장 우아하고 로맨틱한 복수.  재능과 꿈으로부터, 사랑으로부터 현실을 좇아 달아났던 그녀는 속절없이 무너질 수밖에.  더이상 예술을 사랑하지조차 않다는 고백은 처절하다. 빛나는 것들을 버리고 달아난 현실이라는 곳은 더없이 삭막하고 수잔은 거기서 예술에 대해서도, 사랑에 대해서도 불능의 상태에 빠져 있다. 남편은 불륜에 빠져 있고.  그런 수잔 이름앞으로 그녀의 별명을 제목으로 내세운 초고가 도착했다.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