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보선, 식후에 이별하다

식후에 이별하다


심보선



하나의 이야기를 마무리했으니
이제 이별이다 그대여
고요한 풍경이 싫어졌다
아무리 휘저어도 끝내 제자리로 돌아오는
이를테면 수저 자국이 서서히 사라지는 흰죽 같은 것
그런 것들은 도무지 재미가 없다

거리는 식당 메뉴가 펼쳐졌다 접히듯 간결하게 낮밤을 바꾼다
나는 저기 번져오는 어둠 속으로 사라질테니
그대는 남아 있는 환함 쪽으로 등 돌리고
열까지 세라
열까지 세고 뒤돌아보면
나를 집어 삼킨 어둠의 잇몸
그대 유순한 광대뼈에 물컹 만져지리라

착한 그대여

내가 그대 심장을 정확히 겨누어 쏜 총알을
잘 익은 밥알로 잘도 받아먹는 그대여
선한 천성(天性)의 소리가 있다면
그것은 이를테면
내가 죽 한 그릇 뚝딱 비울 때까지 나를 바라보며
그대가 속으로 천천히 열까지 세는 소리
안 들려도 잘 들리는 소리
기어이 들리고야 마는 소리
단단한 이마를 뚫고 맘속의 독한 죽을 휘젓는 소리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먹다 만 흰죽이 밥이 되고 밥은 도로 쌀이 되어
하루하루가 풍년인데
일 년 내내 허기 가시지 않는
이상한 나라에 이상한 기근 같은 것이다
우리의 오랜 기담(奇談)은 이제 여기서 끝이 난다

착한 그대여
착한 그대여

아직도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
열을 셀 때까지 기어이 환한가
천 만 억을 세어도 나의 폐허는 빛나지 않는데
그 질퍽한 어둠의 죽을 게워낼 줄 모르는데


<슬픔이 없는 십오 초>
문학과지성 시인선 346
문학과지성사


=

기어이 환하고야 마는가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해피투게더 (1997)

이제니, 별 시대의 아움

박준, 세상 끝 등대 1

2013년 8월 16일 오후 5시 5분에 저장한 글입니다.

2016년 4월 14일 10대 일간지 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