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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파트릭 모디아노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파트릭 모디아노 Rue des boutiques obscures, Patrick Modiano (문학동네) 그 건물들의 입구에서는 아직도 옛날에 그곳을 건너질러 가는 습관을 익혔다가 그후 사라져버린 사람들이 남긴 발소리의 메아리가 들릴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들이 지나간 뒤에도 무엇인가 계속 진동하고 있는 것이다. 점점 더 약해져가는 어떤 파동, 주의하여 귀를 기울이면 포착할 수 있는 어떤 파동이. 따지고 보면 나는 한 번도 그 페드로 맥케부아였던 적이 없었느느지도 모른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었다. 그러나 그 파동들이 때로는 먼 곳에서 때로는 더 세게 나를 뚫고 지나갔었다. 그러다 차츰차츰 허공을 떠돌고 있던 그 모든 메아리들이 결정체를 이룬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나였다. p.130 잠시 동안 나의 생각은 함수호로부터 멀리 세게의 다른 끝, 오랜 엣날에 그 사진을 찍었던 러시아의 남쪽 어느 휴양지로 나를 실어갔다. 한 어린 소녀가 황혼녘에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해변에서 돌아온다. 그 아이는 아무것도 아닌 일로, 계속해서 더 놀고 싶었기 때문에 울고 있다. 그 소녀는 멀어져간다. 그녀는 벌써 길모퉁이를 돌아갔다. 그런데 우리들의 삶 또한 그 어린아이이 슬픔과 마찬가지로 저녁 속으로 빨리 지워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p.262 = 나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것은 무엇인가. 기억이 내게서 말소된 뒤에도 나를 나로 칭할 수 있을 것인가. 시간으로 만들어진 인간은 그렇게 시간 속으로 사라진다.

도플갱어, 주제 사라마구

도플갱어, 주제 사라마구 Der Dooppelganger, Jose Saramago (해냄) 하지만 사람들이 개를 인간의 가장 좋은 친구라고 하는 것처럼, 질서와 순서도 인간의 가장 좋은 친구이다. 비록 질서와 순서도 개처럼 가끔 사람을 물기도 하지만 말이다. p.71 일초, 일초 시간이 흐를 때마다 문이 열려서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 우리가 미래라고 부르는 것이 앞으로 들어오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가 방금 한 말의 모순적인 본질에 맞서자면, 미래는 그저 광대한 허공일 뿐이며 영원한 현재의 먹이가 되는 시간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p.291 그러면 그의 아내가 물을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당신한테는 적이 하나도 없는데. 안토니오 클라로는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고 대신 적이 없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고, 적은 적을 갖겠다는 우리의 의지에서 태어나는 게 아니라 우리를 갖겠다는 적 자신의 저항할 수 없는 욕망에서 태어나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p.313 = 실존에 예상치 못한 위협이 들이닥쳤을 때 인간이 느끼는 두려움과 당혹스러움을 세밀하게 묘사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존재라는 믿음이 주는 위안은 얼마나 큰지.

연애의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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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쩌다가 우리가 한 침대에서 자게 됐어? # -이거 꿈인가? 꿈이니? 우리가 지금 다시 만난 거. -꿈은 아니야. 넌 꿈에는 절대 안 나타나는 여자니까. 그런여자야 너는. 보고싶어서 한번만 꿈에 나타나 달라고 빌어도 빌어도 안나오던 여자. -꿈 맞네. 강태하는 그런 말 하는 남자는 아니었으니까. -어떤 남자였는데? -맨날 기다리게 하던 남자. 나 혼자 동동거리게 하던 남자. 나보다 중요한 게 엄청엄청 많던 사람. 나를 좋아한다면서 이렇게 하찮게 대할 수 있나 자존심 상하게 하는 사람.. 2. 그 남자랑 헤어지고 나한테 올래? # -우리가 왜 헤어져야 되는데? -그 이유를 모르는 남자니가 헤어지자고 한 거야. 내가 왜 힘들어하는지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남자잖아. # 강태하 때문에 알았어요. 연애는 여자가 움직이는 게 아니라는 걸. 남자를 움직이게 만들어야 되는 거더라구요. 그래야 내가 원하는 걸 얻는 게임이 연애더라구요. 예전에는 그걸 몰랐어요. 5년 전에는 강태하가 나빴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좋다고는 생각하진 않지만, 냉정하게 따지고 보면 제가 남자를 몰랐던거에요. 남자를 다루는 방법을 몰랐던 거. 3. 질투라고 말해도 할 수 없고 # 왜 저 여자를 그렇게 오랫동안 잊지 못했는지 깨달았어요. 한여름이었기 때문이었어요. 그냥, 한여름은 한여름이니까. 이 남자는 여름이를 가졌잖아요. 질투는 아닌데, 아니 뭐 질투라고 해도 할 수 없고. 그냥 이 남자는 자기가 어떤 여자를 가졌는지 알고나 있을까 궁금했어요. 이 남자는 알고 있어요. 자기가 가진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느껴졌어요. 눈부신 자부심이. # 니가 하루종일 공방에서 힘들게 일하다가 집에 돌아왔는데, 말이 잘 통하고 엄청 친한 친구가 기다리고 있어. 좋겠지? 근데 이 친구가 막차 시간이 돼도 안 가. 밤 새워 놀아도 돼. 한방에서 껴안고 잠을 자도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어. 어머니도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

최영미, 옛날의 불꽃

옛날의 불꽃 최영미 잠시 훔쳐온 불꽃이었지만 그 온기를 쬐고 있는 동안만은 세상 시름, 두려움도 잊고 따뜻했었다 고맙다 내게 해준 모든 것에 대해 주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도 = 계절이 깊었다. 온갖 따듯한 것들에 대한 향수가 짙어진다. 추워서 그런거겠지. 나는 담백해지려면 멀었다.

이장욱, 정오의 희망곡

정오의 희망곡 이장욱 우리는 우호적이다 분별이 없었다 누구나 종말을 향해 나아갔다 당신은 사랑을 잃고 나는 줄넘기를 했다. 내 영혼의 최저 고도에서 넘실거리는 음악, 음악은 정오의 희망곡. 우리는 언제나 정기적으로 흘러갔다 누군가 지상의 마지막 시간을 보낼 때 냉소적인 자들은 세상을 움직였다. 거리에는 키스신이 그려진 극장 간판이 걸려 있고 가을은 순조롭게 깊어갔다. 나는 사랑을 잃고 당신은 줄넘기를 하고 음악은 정오의 희망곡 냉소적인 자들을 위해 우리는 최후까지 정오의 허공을 날아다녔다. = 나는 사랑을 잃고 당신은 줄넘기를 하고

백창우, 오렴

오렴 사는 일에 지쳐 자꾸 세상이 싫어질 때 모든 일 다 제쳐두고 내게 오렴 눈물이 많아지고 가슴이 추워질 때 그저 빈 몸으로 아무 때나 내게 오렴 네가 자유롭게 꿈꿀 수 있는 방 하나 마련해 놓고 널 위해 만든 노래들을 들려줄게 네가 일어날 때 아침이 시작되고 네가 누울 때 밤이 시작되는 이곳에서 너를 찾으렴 망가져 가는 너의 꿈을 다시 빛나게 하렴 = 저렇게 쉴 곳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누군가에게 저런 쉼터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누군가의 망가진 꿈을 빛나게 할 수 있는 건 얼마나 장엄하고 숭고한 일인지. 신 말고도 저런 안식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큰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성숙한 인간이 되고 싶다. 사실 이 시와 대구를 이루는 '가렴'이라는 같은 시인의 시가 있는데 그 시는 어쩐지 너무 마음이 아파서 적고 싶지가 않다. 늘 모두가, 오기만 했으면 좋겠다. 떠나지 않고.

나의사랑 나의신부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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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랑 나의 신부 2014 임찬상 조정석(영민), 신민아(미영) 여자에게 첫사랑이란 지금 사랑하는 사람의 첫모습이래. 시가 삶이 되고 삶이 시가 되는 거야. 그렇지만 시 때문에 소중한 것을 놓쳐선 안 돼. 시는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쓰는 거야. 영민씨가 내 첫사랑이야. =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받는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 사랑을 지켜나가기위해 서로 노력하는 삶은 숭고하다.

프랭크(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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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Frank, 2014 레니 에이브러햄슨 마이클 패스벤더 (프랭크),  돔놀 글리슨 (존),  매기 질렌할 (클라라) I love you all. = 평범한 사람들은 자주 비범을 꿈꾼다. 비범함이 어떤 특별한 경험에서 비롯된다는 착각도 자주 한다. 수많은 존들이 프랭크의 베일을 벗겨내고 파헤치고 결국엔 그가 되고싶어한다. 가면 뒤에서 드러난 그 맨얼굴을 마주할 자신도 없는 채로. 동경한다고해서 결코 핵심을 모방하지도 그가 되지도 못한다는걸 잘 알지만 평범한 대부분의 우리들은 그걸 꿈꾼다. 환상에 가까운 어긋난 동경은 비범한 세계의  평정을 산산조각내기도 한다. 가면을 벗고 어딘가 초라해진채로 모두를 사랑한다며 부르는 프랭크의 처절한 마지막 노래에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는 밴드의 모습이 마냥 유쾌하지 않은 것은 그때문이다. 오롯이 지켜줘야만 하는 특별한 세계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많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보다도 진가를 알아주는 사람들 곁에서 빛나는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바닥

바닥 아래엔 또 바닥이 있을까.

슬럼프

장황하고 두서없는 헛소리. 술은 늘 글을 부른다. 1 이처럼 모든게 어렵게 느껴진 시절은 없었다.견줄 만한 때를 꼽으라면 고3 봄 첫사랑과 헤어졌을 그 시간들이려나. 너무 어렸던 나는 어디선가 주워본대로 멍청하게 소주병 나발을 불고 전봇대를 들이받아보기도 했다. 여기저기 기대어 꺽꺽 울며 별의 별 진상과 추태를 다 부려봤다. 지금 돌이켜보면 부끄러운 깊이의 관계였지만 열여덟의 나에겐 그가 평생에 한번 만날 법한 소울메이트로 느껴졌기에 그 분리를 견딜 수가 없었다. 한편으론 대입이 삶의 전부처럼 왜곡돼 보이던 그 나이의 나에겐 이처럼 중요한 시기에 시간과 감정을 소모하고 있는 스스로가 견딜 수 없이 한심하기도 했다. 지금은 되려 그때의 미숙한 순수가 스스로 귀여워 보이거나 그리워지기까지 한다. 그 사이 8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내게는 그 나날만큼 켜켜이 굳은 살이 배겼다. 좀 더 중요한 일들이라던지 그래도 끝내 챙겨야만하는 의무랄 게 생겼다. 스물다섯의 나는 지난 사랑이 한낱 몇 병 술따위론 씻겨내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슬픈 노래 가사의 클리셰들을 경험으로 체득했고 습관처럼 듣는 그 노래들이 결코 상한 마음을 치유하진 못한단 점을 안다. 모든 것은 결국 지나가기에 숱한 상처를 봉합하는 일은 시간과 망각의 일이란 것을 안다. 방금 나를 떠나간 사람이, 혹은 내가 방금 떠나온 사람이 생의 마지막 인연은 아닐거라는 점도 알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무던해지기 위한 사투를 이기지 못하고 백기를 든다. 지나간 사랑을 넘어설 마음을 일으키지 못할까봐 겁에 질린다. 그런 나를 상대가 우습게 알까봐 두려워 가슴속은 곪아든다. 아는 것과 사는 것은 다르다. 어른이 되는 괴로움은 거기서 시작된다. 2 모든게 엉망진창으로 변한 채 연휴가 끝났다. 오랜 벗들을 만나 사는 얘기를 나누고 집으로 가는 길, 사람들은 늦은밤 막차의 빈틈을 빼곡히 메웠다. 그리고 문득 이 모두가 어느 수준 이상의 책임을 수반한 사랑의 결실들이라는 생각이 나를 압도했다

성간여행을 기대하며

= 추석 연휴 동안 다른행성이 돌진해와 지구가 멸망하는 영화랑, 4차원 고속도로 건설을 위해 지구를 부숴버리는 영화와, 지구엔 가망이 없다며 성간여행을 시도하는 영화 예고편을 돌려봤다.  그러고 출근하니 폐쇄등기부등본으로 수십억대 불법 전세담보대출을 받은 일당을 비롯한 세상 만사는 하찮게 느껴졌다. (사실 그 사기꾼 일당은 나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한다.) 인터스텔라 예고편을 보니 좋아하던 시가 왠지 색다른 방식으로 적절하게 인용된 것 같아 공유. #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Dylan Thomas ,  1914  -  1953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Old age should burn and rave at close of day; Rage, rage against the dying of the light. Though wise men at their end know dark is right, Because their words had forked no lightning they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Good men, the last wave by, crying how bright Their frail deeds might have danced in a green bay, Rage, rage against the dying of the light. Wild men who caught and sang the sun in flight, And learn, too late, they grieved it on its way,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Grave men, near death, who see with blinding sight Blind eyes could blaze like meteors and be gay, Rag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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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tila Marcel, 2013 감독: 실뱅 쇼메(Sylvain Chomet) 배우: 귀욤 고익스(Guillaume Gouix), 앤 르니(Anne Le Ny) 추억은 강가의 물고기처럼 머리 깊숙이 살고 있단다. 나쁜 기억은 행복의 홍수 밑으로 보내버려. 수도꼭지를 트는 일은 네 몫이란다. 기억은 일종의 약국이나 실험실과 비슷하다. 아무렇게나 내민 손에 어떤 때는 진정제가, 어떤 때는 독약이 잡히기도 한다.  Vis ta vie! 네 인생을 살거라. # 기억만큼 부정확하면서도 또렷한 게 있을까. 사람들은 저마다 다르게 적히기도 하고 세월에 따라 변하거나 희미해지기도 하는 기억을 때로 맹신한다. 좋은 기억은 더없이 미화되기도 하고 나쁜 기억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큰 상처를 주기도 한다. 전부다 낱낱이 기억하지 못하고 잊으며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축복이다. 결국 한 사람의 내일을 정의하는 것은 오늘이지 어제가 아니다. 어제는 어제일 뿐. 우리는 눈앞에 주어진 인생을 살아내면 되는 것이다.  특별한 정원이나 한잔의 차, 마들렌, 그리고 음악은 단지 거들 뿐! 미처 자라지 못한 영혼을 지닌 어린 어른이 그의 기억과 추억을 더듬어 그의 아버지 Attila Marcel이라는 존재와 끝내 화해하는 이야기. 아이가 아빠를 부르는 순간은 그래서 경이롭다. 마담 푸르스트의 비밀 정원은 도구일 뿐 본질은 폴과 그의 아버지에 있다는 점에서 원제가 ‘옳다’는 생각이 든다.  

행복한 사전(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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舟を編む(2013) 감독: 이시이 유야 출연: 마츠다 류헤이, 미야자키 아오이, 오다기리 죠 "서쪽을 향해 섰을때 북쪽이 오른쪽입니다." "말의 의미를 알고 싶다는 건 누군가의 생각이나 감정을 정확히 알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과 이어지고 싶다는 소망은 아닐까요?" "사랑: 어떤 사람을 좋아하게 되어 자나깨나 그 사람 생각이 떠나지 않고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지 않게 되며 몸부림치고 싶어지는 마음의 상태. 이루어지면 하늘에라도 오를 듯한 기분이 된다." "'감사' 라는 단어 이상의 단어는 없는지 저 세상이 있다면 거기서 용례 채집을 해 볼 생각입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나, 4학년 때였나. 책에 푹 빠져 지내던 나는 갓 생긴 학교 도서관이 문을 닫을 때까지 집에 가지 않았다. 글의 세계는, 그리고 말의 세계는 무궁무진했다. 읽어도 읽어도 끝이 없었고 언제나 새로운 말들이 불시에 튀어나왔다. 사전을 끼고 책을 읽었다. 그러다 나는 사전을 읽기 시작했었다. 'ㄷ'의 중간까지 읽었던 걸로 기억한다. 어쩌다 사전을 읽을 생각을 했는지 어떤식으로든 좋은 영향을 받았으리란 생각에 지금 돌이켜봐도 스스로 기특한 기분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나는 자라나며 기계 문명의 혜택을 지나치게 받게 됐고 종이사전으로부터는 점점 멀어져갔다. 공부를 하겠답시고 책상머리에 앉은 중학교 때부터 전자사전이 필수품이 됐고 대학에 진학해서는 휴대폰의 사전 기능에 자꾸만 손이 갔다. 영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조금은 부끄러웠다. 한때 사전에 남다른 애착을 가졌던 사람으로서 사전은 누가, 어떻게 만드는가에 대해선 진지한 고민을 해보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행복한 사전'은 사전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대답을 길고 느린 호흡으로 풀어낸다. 경이에 가까운 그 작업은 부족

윤일병 잘 가요

“네가 한알의 밀알 되기를… 사랑한다, 아들아” “4월 5일 네가 전화했을 때. ‘엄마 (면회) 오지 마. 4월은 안돼’ 했을 때. 미친 척하고 부대로 찾아갔더라면…. 면회가 안 된다는데 찾아가면 혹시 너에게 불이익이 있을까봐 엄마는 그저 주저앉고 말았단다. ○○야, 정말 미안하다. 바보 같은 엄마를 용서해라.” 육군 28사단에서 선임병들의 가혹행위로 숨진 윤모(20) 일병의 어머니 안모(58)씨가 8일 저녁 서울 용산구 국방부 앞에 갔다. 군인권센터가 주최한 ‘윤 일병과 또다른 모든 윤 일병들을 위한 추모제’에 참석해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었다. 아들의 전화를 받고도 혹독한 상황을 눈치채지 못했던, 혹시 아들이 불편할까봐 꾹 참고 면회를 포기했던 엄마는 한맺힌 눈물을 흘렸다. 안씨는 오후 9시20분 한손에 손수건을 들고 추모제 무대에 섰다. 흐느끼며 편지를 읽어내려갔다. “보고 싶고 또 보고 싶은 사랑하는 아들. 네가 하나님 품으로 떠난 지 벌써 넉 달이 지나고 있구나. 엄마는 그 시간을 어떻게 살아냈는지. 제발 꿈이었다면….” 아들의 ‘사고’를 접한 날은 이렇게 회고했다. “4월 6일 네가 의식을 잃고 이송되고 있다는 비보를 듣고도 병원으로 달려가는 차 안에서 이런 생각을 했단다. 훈련소 퇴소 후 한번도 만나지 못한 네가 얼마나 가족이 보고 싶었으면, 하나님이 이렇게라도 네 얼굴을 보여주시려고 한 게 아닌가.” 한걸음에 달려간 병원 응급실에는 “너무나도 참혹한 모습으로 힘없이 누운” 아들이 있었다. 그 모습에 안씨는 “하늘이 무너지고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고 했다. 하루하루 고통과 피눈물로 살아간다는 어머니의 고백이 이어지자 다른 희생자 유족과 시민들도 울음을 터뜨렸다. 안씨는 “늘 부족했던 부모에게 불평 한번 않고, 장학금을 받고, 방학이면 개학 하루 전까지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부모님 용돈까지 챙겨주던 속 깊은 아들”이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편지는 이렇게 마무리됐다. “네가 한 알의 밀알로 이 땅에 썩어져 널 통해

강신주의 감정수업, 강신주

아직도 사랑하고 있기에, 우리는 잔인해질 수도 있다. 그래서일까, 스피노자도 잔학함과 잔인함 속에는 사랑의 감정이 깔려 있다는 것에 주목했던 것이다. p.172 = 강신주가 자신의 문장으로 직접 쓴 부분중에 유일하게 맘에 담고 싶었던 건 저 두문장 뿐이었다. 500페이지가 넘는 책이 이렇게 내게 홀대받기도 쉽지 않다.  전반적으로 오만방자하다.  작가는 스피노자의 입을 빌려 48가지 감정을 정의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정의와 설명, 감정에 대한 태도, 그 감정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자들에 대한 분석이 철학자의 열린 사고라고는 믿기 힘들만큼 편협하고 고압적이었다. 작품에 대한 깊이있는 통찰도 제시하지 못했다. 애초에 '감정수업'이라는 제목 자체가 모순적이었던것 같기도 하다.  감정은 학습보다는 경험이라고 생각하는 내게는 적어도 그랬다. 몇장 넘기다 말고 때려치고 싶었지만 끝가지 읽는 자에게 비판할 권리도 주어진다는 믿음으로 읽었다.

도시의 쓰레기 탐색자, 제프 페럴

물건을 버리는 사람들은 버리는 물건 자체를 통해 자신들이 인식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표식을 남기게 된다. p.71 결과적으로 한때 쓰레기로 버려진 물건들 때문에 길거리의 또 다른 세계는 물질문화의 풍요로움을 맛보게 된다. 수천 개의 쇼핑몰과 전통물품 상점, 소매점 등에서 끊임없이 배출되는 쓰레기가 바로 이 세계에 정착하면서 잃어버린 것들의 물질세계를 구축한 것이다. p.90-91 누군가의 잊힌 인생처럼, 쓰레기를 수집하다 보면 많은 잊힌 것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 세계의 모든 버려진 것들은 주인의 삶 가운데서 어느 날 문득 튀어나와 그 삶의 속도와 패턴에 대해 말해주곤 한다. p.159 도시의 특권츠과 가난한 사람들이 만나는 뒷골목과 쓰레기통들은 여전히 열려 있는 물질의 경계선이다. 비록 완전히 열려 있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상대적으로 꽉 막힌 종교적 자비심이나 정부 기관들의 소심함에 비한다면 쓰레기통과 쓰레기더미들은 상대적으로 훨씬 자유롭게 상호간의 필요를 채워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p.303-304 버려진 옷이나 깡통이 어디에 있는지, 매일매일 어떻게 살아남았는지에 대해 온통 관심을 쏟게 되는 길거리의 세계는 철저히 현실적이면서도 동시에 깊은 대안적 의미의 세상을 품고 있다. 내가 그렇게 살았듯, 그 세계에서 노동한다는 것은 오랜 세월에 결쳐 이루어진 오늘날의 소비문화를 무너뜨리는 작업에 동참하는 것이며, 법과 범죄의 경계를 허무는 작업이며, 시간과 공간, 정체성의 현실성을 되돌아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p.341 = 우리가 배출하는 쓰레기는 우리가 애지중지 보관하고 있는 것들보다 우리를 더 적나라하게 서술하고 있다. 하성란의 '곰팡이꽃'이 마냥 허무맹랑한 얘기로 느껴지지만은 않는 것도 그때문이다. 선뜻 나서 새로운 문화에 뛰어든 작가에게 박수를.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이 인공의 생태, 새로운 세계를 어떻게 기사로 다뤄 볼 방법은 없을까. 폐지 모으는 노인들이 단가 하락으로 애를 먹고 있다던가,

청춘의 문장들 +, 김연수

네 마음 속으로 그 어떤 손님들이 찾아온다고 해도 너는 언제나 너일 뿐, 그 손님들 때문에 다른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니 네 마음 속으로 찾아오는 손님들을 기꺼이 맞이하기를. 그가 어떤 사람이든 화를 내거나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거나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이지 말기를. p.9-10 언젠가도 그렇게 쓴 적이 있는데, 열망을 열망하고 연애를 연애하고 절망을 절망하던 시절이었죠.원하는 현실 대부분은 저 멀리, 아주 멀리 있었어요. 심지어 절망마저도. 그래서 진짜 절망하는 것도 힘들었던 시절이었어요. p.46 우리가 믿는 것들은 대개 무지와 오해에서 비롯된 환상일 가능성이 많다. 또 우리는 무지하지 않은데, 정치인 등이 우리를 오해하게 만들어 환상을 보게 하는 경우도 많다. 나는 그런 환상의 본질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소설을 썼다고 할 수 있다. p.62 이야기라는 건 이성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어떤 일들을 납득하기 위해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p.69 나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들에만 관심이 갈 뿐이다. 짐작과는 다른 일들, 혹은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만이 나의 관심을 끈다. 스무살 이후로 내게 삶이란 그런 일들만을 모아놓은 상점 같았다. ... 대체적으로 삶이란 짐작과는 다르다. 그 사실을 깨닫게 된 순간부터 나는 삶을 추측하는 일을 그만뒀다. 삶이란 추측되지 않았다. 그냥 일어날 뿐이었다. 소설은 그 일어난 일들의 의미를 따져보는 일이다. 짐작과 달랐던 일들의 의미를 나와 당신이 함께 납득해가는 과정이다. 삶의 어느 순간에, 당신이나 내게 진심으로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던, 혹은 진심으로 기뻐하게 만들었던 그 일들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는 걸 당신과 내게 납득시키는 일이다. 당신이나 나나 이제 다른 존재가 돼 살아가겠지만, 그 일들이 사라지지는 않으리라. p.100-101 봄날은 지나간다고 말할 때는 이미 봄날이 다 지나간 뒤다. 어제 피었다가 오늘 저녁에 떨어지는 꽃잎들처럼, 지나가는 봄날은 자취 없고 가뭇없다. 우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그대를 생각하며 밤을 마주할 때 나는 비밀이 된다. 무엇으로도 해독할 수 없는 암호가 된다. 그대는 오래 전부터 내게 비밀이었다. 내가 밤을 사랑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 그리하여 밤의 몸과 밤의 살갗과 밤의 온기를 나는 사랑한다. 밤에 그대는 어둠 속으로, 비밀 속으로, 스며들 것이다. p.93-94 한 사람을 위해서만 쏟아지던 감정이 갈 곳을 잃고 마음속에서 넘쳐나고 있었다. ... 그 집 식구들은 모두 스물넷에서 서른두 살 사이의 사람들이었다. 인생의 정거장 같은 나이. 늘 누군가를 새로 만나고 또 떠나보내는 데 익숙해져야만 하는 나이. 옛 가족은 떠났으나 새 가족은 이루지 못한 나이. 그 누구와도 가족처럼 지낼 수 있으니 다음날이면 남남처럼 헤어질 수 있는 나이. p.136-137 = 인생의 정거장에서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밤을 지나고 있다. 안녕과 안녕 사이에서 시간은 어떻게든 부지런히 흘러간다.

로맨스가 필요해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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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은 남자들과 입을 맞추고도 왜 내가 혼자 있는지 깨달았다. 내가 이 남자를 가장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가 바빠서 화가 난 게 아니었다. 네 시간을 기다려서 화가 난 게 아니었다. 첫키스를 한 지 1000일이 된 거, 그런 것쯤 나한테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냥, 그 말 몇마디면 되는데. 막차가 떠날 때까지 윤석현은 안왔다. 그때는 그게 나를 사랑하지 않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그냥 이 닫힌 문이 동굴이고, 그는 어두컴컴한 동굴에 들어가 겨울잠을 자고 있는 한 마리 곰일 뿐임을 안다. 그때의 나는 순수하고 아름다웠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다면, 조금 다른 연애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아쉬움만 남을 뿐이다. 사랑받고 싶었다. 하지만 구걸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원하는 건 뜨거움이 아니라 애틋함이다. 정답고 따뜻하고 반짝반짝한 느낌. 나에게 필요한건 로맨스였다. 지금 질투하는 거잖아. 왜, 질투하면 안돼? 질투하면 찌질한거야? 난 질투 유치하다고 생각 안해. 질투는 세상에서 가장 솔직한 고백이야. 질투라고는 모르는 너 같은 인간이 건강하지 않은거지. 생각해보니까 나는 한번도 너를 좋아하지 않은 적이 없었어.  도대체 진심이 뭔지 몰라서 지치고 힘든데, 근데도 난 너 좋아해. 미친거지 내가. 그 입맞춤이 좋았다. 첫키스보다 좋았다. 사랑한다는 말보다도 좋았다. 만진다. 잡는다. 간다. 온다. 가르친다. 외출한다. 본다. 느낀다. 슬퍼한다. 화난다. 밉다. 운다. 웃는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많이많이 사랑한다. 상처입는다. 상처입힌다. 키스한다. 그리고 잔다. 이 수많은 말들중에 나하고 상관 없는 거 있어? 넌 항상 끝이 아니야. 여기가 끝이다 싶으면 또 다시가. 어. 나는 끝까지 가는 사람이야. 마음이라는 건 육체의 어디에 붙어있을까. 어디에 붙은건지 몰라서 마음이 아플 때는 속수무책 앓고 있는 수밖에.

사랑은 왜 불안한가, 에바 일루즈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자주권을 잃는다는 뜻이다. 낭만주의 시대에 사랑은 거역할 수 없는 자연의 힘이 빚어내는 고결한 열정의 직접적 경험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현대 들어 자주권 상실은 심각한 문제를 노출한다. 자아가 상대방의 의지 앞에 고개를 숙이는 모양새를 취하는 탓에 사랑이 자아 스스로 자율성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이로써 자아에 흠집이 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하는 태도가 빚어진다. 이것이 특히 문제가 되는 까닭은 자율성이야말로 현대인의 핵심적 특징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p.63 상징적이든 물리적이든 폭력이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면, 여기서 사랑은 그 폭력이 몸과 마음과 자아에 남긴 것을 일어나지 않은 일로 되돌리고, 철학자 사이먼 메이가 '존재론적 닻 내림'ontological groundedness이라 부른 것을  중개해준다. 이는 곧 적막하기만 한 세상에서 나만의 가정을 찾아냈다는 느낌이다. p.74-75 사랑은 지성의 능력으로는 풀 수 없는 가장 괴이한 모순이라고 헤겔은 썼다. 자신을 부정하면서도 긍정을 이뤄내는 이 극한 모순은 그러나 고맙게도 불합리와 부조리로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에게 비춰진 유일한 구원의 빛이다. 나를 넘어서서 남에게 손을 내밀어 우리를 이뤄내는, 이 부정과 긍정의 '종합, 진테제synthese'야말로 '하나 됨'을 실현하는 사랑의 본모습이기 때문이다. 헤겔이 사랑이라는 모순의 본격적 풀이를 철학이 최고 과제로 삼은 이유가 달리 있는 게 아니다. p.116 = 솔직히 말하면 분석 되상이 되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읽지 않아서 원론적인 내용을 서술한 부분들에밖에 공감을 던지지 못하겠다. 똑똑한 사람 참 많다. 이런 분석을 끌어내는 글이라면 로맨스 소설일지라도 한번쯤 읽어볼만 할 듯 싶다.

우리는 사랑일까, 알랭 드 보통

D.H. 로렌스의 정의에 따르면 그녀는 다른 사람, 다른 나라, 다른 연인 같은, "다른 것에 향수를 느끼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낭만주의자였다-그것은 랭보가 청춘 시절 "la vie est ailleurs(인생은 다른 곳에 있다)"라고 했던 말의 메아리와 같다. 하지만 다른 것에 대한 갈망을 병이라 한다면, 이런 병은 어디서 생겼을까? p.9 사랑의 첫 단계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지만, 욕망은 사소한 실마리에서도 피어났고, 공백을 메우고자 상상력이 발휘되었다. p.80 경제의 세계에서는 빚이 나쁜 것이지만, 우정과 사랑의 세계는 괴팍하게도 잘 관리한 빚에 의지한다. 재무 정책으로는 우수한 것이 사랑의 정책으로서는 나쁠 수가 있다-사랑이란 일부분은 빚을 지는 것이고, 누군가에게 뭔가를 빚지는 데 따른 불확실성을 견디고, 상대를 믿고 언제 어떻게 빚을 갚도록 명할 수 있는 권한을 넘겨주는 일이다. p.140  에릭은 듬뿍 사랑받거나 미움받는데 저항하는 것 같았다. 그 남자는 앨리스가 관계에 의심을 품을 때를 감지하는 촉각을 갖고 있었지만, 그 전에는 그녀의 감정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이것이 의식적인 현상이라면, 그 남자가 며칠간 앨리스를 무시하는데는 극단적인 데가 있었다. 그러다 그녀가 화내기 직전에 물러서거나 사과하는 식이었다.  앨리스는 사랑하는 남자에 대해 아는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그 남자의 행동은 여전히 수수께끼였다. 에릭은 처음 만날 날과 똑같이 복잡해 보였다. p.149 위니캇과 피아제의 이론을 앨리스와 에릭에게 적용하는 것은 지나친 일일지도 모르지만, 영속성이라는 문제는 공통된다. 여기서는 대상 영속성이 아닌 사랑의 영속성 문제다. 이 사랑의 영속성이란 무엇인가? 상대가 당장 관심의 징표나 신호를 보내지 않아도 사랑이 지속되리라는 믿음, 상대가 밀라노나 빈에서 주말을 보내더라도 다른 정인과 카푸치노를 마시거나 초콜릿 케이크를 먹지 않으리라는 믿음, 침묵은 단순

예언자, 칼릴 지브란

그러나 우리의 사랑은 그림자에 가려져 말로 표현할 수 없었으니 이제는 그 사랑이 그대를 큰 소리로 부르며 그대 앞에 드러나 서리라. 참으로 사랑이란 이별의 날이 오기까지는 그 깊이를 알지 못하는 것이라. (p.17-18) 사랑이 그대들을 부르면 사랑을 따르라. 비록 그 길이 험하고 가파르더라도 사랑의 날개가 그대들을 감싸 안으면 그대들의 온몸을 사랑에게 맡겨라. 그 부드러운 날개털 속에 숨겨진 칼날이 그대들에게 상처를 입힌다 해도, 사랑이 그대들에게 말하면 사랑을 믿으라. 겨울바람이 뜰을 황량하게 만들듯이 사랑의 말이 그대들의 꿈을 산산조각 낸다하여도, 사랑은 그대들을 괴롭히는 만큼 영광스럽게 할 것이요, 사랑은 그대들의 가지를 베어 내는 만큼 그대들을 성장하게 하리니. 사랑은 그대들의 가장 깊은 곳까지 내려가 근원에 잇닿은 그대들의 뿌리를 흔들어 놓겠지만 사랑은 또한 그대들의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가 햇빛 아래 떨고 있는 그대들의 연약한 가지를 보듬어 안아 주리라. ... 사랑은 자기 자신만을 주고 자기 자신에게서만 받으며 사랑은 소유하거나 소유당하지 않으니 사랑은 사랑만으로 충분하리라 (p.23-26) 아, 심지어 신의 침묵 안에서도 그대들은 함께하리라 그러나 함께 있되 그대들 사이에 거리를 두어라. 그래서 하늘 바람이 그대들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서로를 사랑으로 속박하지는 말라. 그보다는 그대들 영혼의 기슬 사이에 바다가 흐르게 하여라. 서로의 잔을 채우되 한쪽의 잔만을 마시지는 말라. (p.29) 삶은 진실로 열정이 없을 때에 어둡고 모든 열정은 깨달음이 없을 때에 맹목적이며 모든 깨달음은 일이 없을 때에 쓸 데가 없고 모든 일들은 사랑이 없을 때에 텅 빈 것이라. 그리고 그대들이 사랑으로 일할 때, 그대들은 스스로를 만나고 또 다른 이들과 연결되고 결국에는 신에게로 이어질 수 있으리라. (p.49) "나는 진리를 찾았다."라

사슴 사냥꾼의 당겨지지 않은 방아쇠, 이해경

소영은 운명을 인연으로 바꿔 생각해봤다. 인연을 믿는다? 그냥 오는 거지. 오면 엮일 수밖에 없는 거지. 왔다 간다면? 안 보낼 도리가 있을 텐가. 혹은 보내고 싶어도, 떠나지 않는 그 인연이 지겹다 해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소영은 하고 있었다. (p.100) 우진은 지난봄 한숙의 손을 잡고 덕수궁 돌담길을 걸었던 그날 이후로 자신의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느꼈다. 몸과 망ㅁ과 정신이 한꺼번에 쑤욱 자라버린 느낌이었다. 그것은 착각이었지만, 착각도 변화일 것이었다. 착각이라는 변화 혹은 변화했다는 착각에 힘입어 우진은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결정적인 것은 시인의 마음이었다. 이를테면 첫 키스가 왜 날카로운지,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겠다는 다짐의 의미라든가, 강을 건너는 님을 바라보는 이의 심정 같은 것을 우진은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p.123-124) 시인의 특기는 역설과 반복이었다. 용기는 정직한 자의 것. 겸손이 지혜를 낳지 않더냐. 참고 기다릴지어다. 우진은 시인에게 물었다. 무엇이 정직이고 겸손이란 말인가요. 시인의 대답은 무심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할 것. 자기 생각을 많이 하지 말 것. 참고 기다릴 것. 우진이 알아들은 말은 한 가지뿐이었다. 우진은 참고 기다렸다. (p.125) 하늘 한번 처다볼 겨를 없이 봄은 갔다. 소영에게 시간은 흐른다기보다 어지럽게 흩어지는 느낌이었다. 그해 1983년 봄, 흩어지는 시간의 틈바구니에서 어디서든 혼자 있을 때, 소영은 그 노래를 나지막이 부르며 어두워가는 분숫가를 떠올렸다. 해 질 무렵 물을 뿜지 않는 분수처럼 쓸쓸한 풍경이 또 있을까. 소영은 눈을 감고 노래 속으로 들어가 말라붙은 분숫가를 서성이며,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일에 대해 생각했다. (p.190) 왜 날 사랑하나. 노래의 반 이상을 채우며 되풀이되는 그 말을 한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날 사랑하나. 한수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 말을 하

베스트 엑조틱 메리골드 호텔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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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rything will be alright in the end, if it's not alright then it's not yet the end. You can have anything you want. You just need to stop waiting for someone to tell you deserve it. The only real failure is the failure to try. and a measure of success is how we cope with disappointments as we always must. Nothing here has worked out quite as I expected. Most things don't. But sometimes what happens instead is the good stuff. There is no past that we can bring back by longing for it. Only a present that builds and creates itself as the past withdraws. Initially you're overwhelmed. But gradually you realze it's like a wave. Resist, and you 'll be knocked over. Dive into it, and you'll swim out the other side.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있다. 그 어느 곳인들 아니리오.

고래, 천명관

춘희는 자신의 인생을 둘러싼 비극을 얼마나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을까? 그녀의 육체는 영원히 벗어던질 수 없는 천형의 유니폼처럼 단지 고통의 뿌리에 지나지 않았을까? 그 거대한 육체 안에 갇힌 그녀의 영혼은 어떤 것이었을까? 사람들이 그녀에게 보여줬던 불평등과 무관심, 적대감과 혐오를 그녀는 얼마만큼 이해하고 있었을까? ... 뭔가 불순한 의도를 가진 자들만이 세상을 쉽게 설명하려고 한다. 그들은 한 줄 또는 두 줄로 세상을 정의하고자 한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명제가 그런 것이다. 법 앞에서 만인은 평등하다 (p.393) 그간 춘희의 수형생활은 침묵과 망각의 시간으로 채워졌다. 그녀는 사람들이 두려웠다. 그래서 언제나 사람들을 피해 구석자리를 찾아다녔다. 그동안 새순처럼 여리고 무구한 춘희의 감성은 깊은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춘희는 자신의 상처를 어떤 뒤틀린 증오나 교묘한 복수심으로 바꿔내는 술책을 알지 못했다. 고통은 그저 고통일 뿐 다른 어떤 것으로도 환치되지 않았다. 상처는 지워지지 않았고 그녀의 가슴 한가운데엔 고통이 화석처럼 굳게 자리를 잡았다. 그것이 춘희의 방식이었다. (p.445) 왜냐하면 그녀의 노동이 단지 무료함을 견디기 위해서라고 하기엔 너무 필사적이었으며 단지 유희라고 하기엔 너무나 고된 일이었으며, 또 단지 그리움 때문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반복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 진실이란 본시 손안에 쥐는 순간 녹아 없어지는 얼음처럼 사라지기 쉬운 법이다. 그래서 어쩌면 혹, 그 모든 설명과 해석을 유예하는 것만이 진실에 가까워지는 길이 아닐까? 그럼으로써 그녀를 단순하고 정태적인 진술 안에 가둬두지 않고 자유롭게 풀어주는 것만이, 또 그럼으로써 그 옛날 남발안의 계곡을 스쳐가던 바람처럼 가볍게 흩어지도록 놓아주는 것만이 진실에 다가가는 길은 아닐까? 독자 여러분, 이야기는 계속된다. (p.516-517) = 이야기는 계속된다. 전에 겪어 보지 못한 방식으로 서사는

김남조, 편지

편지 김남조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었다 이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준 이가 없었다 내 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 구절 쓰면 한 구절을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번도 부치지 않는다 = 서둘러 퇴근을 하고 그를 만나러 가는 길. 문득 경찰서 너머로 보이는 하늘이 눈부셔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을지로입구역이었던가. 무심코 멈춰서 눈앞의 시를 훑다가 눈물이 났다. 솔직한 낱말들, 꾸밈없지만 마음보다도 정확한 문장들. 정말이지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생각만으로도 글썽글썽한 누군가가 있다. 그건 때때로 견디기 힘들 정도로 아픈 일이지만, 참 감사하고 행복한 일이다.

Le week-end (2013), 위크엔드 인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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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의 딥키스가, 남편과의 달콤한 전화통화가 의아한 일로 여겨지고 그 시선이 농담처럼 소비되는 현실이 슬프다.  이 부부처럼 유쾌하고 신명나게 쉼 없이, 지침도 없이 사랑하며 늙어가고 싶다.  섹스보다 사랑이 어렵다는 고민을 그토록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털어놓다니. 런닝타임 내내 배나온 이 영국인 아저씨는 줄곧 귀엽다.  같이 늙어간다는것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일이다. 아름다운 일들이 흔치 않은 현상이 돼 가는 시대에, 나는 여전히 그걸 꿈꾼다. @아트하우스 모모 2014. 05. 04. 

선택

일년이라는 시간을 그저 흘려보냈던걸까. 남은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돌아설만큼 치기어린 무모함이 남아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얼마나 오랫동안 나를 돌보지 못했는지를 생각하면 지금의 기분을 찰나의 충동이나 철없는 불만족에서 오는 응어리라고 치부할수만은 없다. 100세 시대라는데 나는 고작 스물 여섯. 이제 막 봄을 지나 초여름에 접어들었다. 겁에 질려 진짜 나를 외면하기엔 남은 날이 무수하다. 행복하고 싶다. 가지 않은 길로 시선을 돌려야 할 때다.

Newseum, 기자부심을 느끼는 시간

일을 마무리하고 본격 관광에 나선 첫날, 비가 온다기에 안으로만 다니는 일정을 잡았는데 날은 쾌청했다.  NEWSEUM 인상적이었다. 두어 시간 둘러보면 끝날 줄 알았는데 볼거리가 예상보다 많았다. 네시간을 보내고도 아쉬움이 남을 줄이야. 프레스카드를 본 직원이 저널리스트 할인을 해 줘서 기분도 좋았다. 주로 미국 언론의 발자취이긴 하지만 어쨌든 아레오파지티카부터 오늘자 세계 조간 1면에 이르기까지 뉴스가 지나온 족적을 훑을 수 있는 이례적인 공간이었다. 여기저기서 눈에 띄는 언론 관련 인용문은 문장의 아름다운 힘을 내뿜고 있었다. 몇 군데 전시실에서는 주책맞게도 눈물이 났다. 마음이 점점 나약해지는건지 그래도 아직 때가 덜 타서인지 이유는 모르겠다. 911 테러 보도에 대한 전시관 앞에는 크리넥스 티슈 한통이 무심한 듯 놓여있었다. 그 정물에서 무심한체 하는 사소하지만 따듯한 배려가 느껴졌다. 이 참사는 '민족'이라고는 부를수 없는 이 나라 국민들에게 얼마나 버거운 공동의 기억이었을까. 완전한 타인인 내 피부로도 그 비통의 무게는고스란히 전해졌다. "BASTARDS!" 정제되지 않은 헤드라인으로 절규할수밖에 없었던 그날의 마음들은 살아있는 역사가 됐다.  퓰리처관에서도 눈물이 났다. 찰나에 스러져갈뻔한 진실들이 프레임 안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사진은 정말이지 가장 강력한 무기다. 백마디 말로도 대신할 수 없는 힘을 사진은 가지고 있다.  여러모로 기자질 한번 열심히 해봐야겠다는 마음이 이 공간과 시간 사이에서 꿈틀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당장 마지막 전화인터뷰 녹취 푸는 일은 끝끝내 미뤄두고 있는 나다. NATIONAL GALLARY 유럽 있을 때 그림이라면 진절머리가 나도록 봤지만 그래도 지나칠 순 없었다. 평소 보고싶었던 인상파 작품 일부를 소장하고 있는 곳이었으니까. 서관을 둘러보는데 끊임없이 길을 잃는 바람에 모든 전시실을 제대로 본건지조차 의심스럽다. 그래도 대강 보고싶었던 작품은

두번째 출장지, Washington D.C.

총맞고 얼떨결에 타클로반 피해 취재하러 필리핀으로 날아간 지 6개월이 채 안 됐는데 또 출장을 왔다. 사스마리 치고 잦은 출장이다. 이번엔 그래도 내가 준비한 기획으로 떠나는 출장이라 하고자 하는 바가 많다. 꼬박 하루가 흘렀다. 정신없이 24시간이 지나가버렸다. '미국 동부 폭설'은 기사 속의 활자를 넘어 내게 급습해왔다. 비행기가 6시간 가까이 연착된 것도 모자라 공항에 내려 짐 찾는 데만 두시간이 걸렸다. 지하철 타고 호텔까지 갈 엄두가 나지 않아 무려 택시를 타는 만용을 나는 부렸다. 혼자서 섭외의 장벽을 기어넘고 통역도 없이 급하게 미국으로 날아오느라 벌써 지친 기분이다. 왠지 모르게 외롭기까지 하다. 시차 때문에 이사람 저사람 붙들고 중얼거리기도 쉽지 않다. 예정됐던 인터뷰 두 건은 잘 마쳤다. 영어는 줄곧 잘 되다가도 인터뷰이한테 중요한 질문만 할라 치면 배배 꼬였다. 점점 더 많은 능력들이 내게서 우수수수 빠져나가는 것 같다. 아쉬운대로 녹취 딕테이션 하고 번역하는데 사활을 걸어야지. 오늘 밤부터 내일까지는 녹취한 인터뷰 풀고, 번역하고, 받아온 자료들 번역하고 정리하는 데 집중할 생각이다. 밖에도 안 나갈 요량으로 마트에서 과일, 요거트, 물 따위를 샀다. 수요일쯤 핫라인 센터 한군데 정도만 더 들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 기사 한 회는 쓰고도 남을 것 같다. 계획은 목요일오후부터는 신나게 놀다가 귀국하는건데 생각처럼 잘 될런지는 모르겠다. 타클로반 취재 마치고도 하루 반쯤 세부에서 시간이 있었지만 피로 풀고 잠 자는데 시간 다 쏟았었는데. 이번엔 기를 쓰고라도 돌아다니다 비행기 타기로 결심해본다. 돈 아끼지 않고 먹을것 잘 먹고 오리라 다짐했었는데 호텔 레스토랑은 생각보다 맛이 없고 주변에도 먹을만한 곳이 보이질 않는다. 팁 계산하는 법은 어렵기만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여행을 다니면 식욕이 사라지는 억울한 습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배도 많이 고프지 않다. 샌드위치, 과일, 요거트 이런걸 주식 삼

천국보다 낯선, 이장욱

떨어지는 빗방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떨어진다. 행인들이 우산을 펴 드는 모습 역시 마찬가지다. 서로 다른 자사로, 다른 표정으로, 다른 각도로, 우산을 펴 든다. 풍경이란 언제나 그런 방식으로 펼쳐진다. 그것이 좋다고, 나는 생각한다. ... 나는 인생이라는 단어에 호의적인 편이 아니다. 하지만 어떤 인생도 멸시받아서는 안 되며, 각각의 인생은 각각의 방식으로 존중받을 가치가 있음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인생이 존중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면, 인생의 끝 역시 존중받을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죽은 사람에게 예의를 갖추어 슬픔을 표하는 것, 그것은 같은 시간을 지나온 인간으로서 불가피한 일이다. 그것 자체가 문명의 형식이라는 것을 나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p.10~11 어떤 비극은 리듬조차 견디지 못한다. 그것이 리듬의 탓이 아니라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비극의 탓은 더더욱 아니다. p.12 사랑은 때때로 우리를 구원하지만, 아니 사랑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사랑이 세계의 진실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세계의 진실이란 밤처럼 냉정한 것이다. 그것은 차라리 사랑이 완전하게 사라진 상태에 가깝다. 우리가 그것을 깨닫는 것은, 대개 이미 늦은 다음이지만. p.29 영혼의 거죽 아래에는 보이지 않는, 고요한, 그러나 들끓는 심연이 있다. 그 심연은 말로 표현되지 않는다. 그것은 때로 밤의 호수처럼 아름답고, 때로 밤의 늪처럼 두려울 뿐이다. 심연은 이 세계의 많은 것들과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그 심연, 호수, 늪을 기록하는 것이 내가 소설을 쓰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정치니 법이니 신문 기사 같은 것들의 단순하고 명료한 언어들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실연 때문에 자살했다느니, 실업을 비관해 투신했다느니, 원한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느니 하는 말들을 거의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언제나 표면만을 부유하는 그 언어들을 인간에 대한 모독으로 느꼈기 때문에...... 소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