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김영민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김영민 / 어크로스




삶이 곧 죽음이라면, 그리하여 이미 죽어 있다면, 여생은 그저 덤이다.
그리하여 나는 어려운 시절이 오면, 어느 한적한 곳에 가서 문을 닫아걸고 죽음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불안하던 삶이 오히려 견고해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도 삶의 기반이 되어주는 것은 바로 그 감각이다. 생활에서는 멀어지지만 어쩌면 생에서 가장 견고하고 안정된 시간. 삶으로부터 상처받을 때 그 시간을 생각하고 스스로에게 말을 건넨다. 나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버티고 살아갈 수 있다고.
p.7-8

요컨대, 상대를 따듯하게 대해주는 일상적인 습관이 중요합니다. 지금 이 순간 두 사람의 감정이 아무리 뜨거워도, 그 애정이 이 따뜻함의 습관을 만들어주지는 않을 겁니다. 그보다는 거꾸로, 일상적으로 따뜻함을 실천하는 습관이 길게 보아 두 사람 간의 애정을 만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p.47-48

쉰다는 것이 긴장의 이완을 동반하는 것이라면, 오직 제대로 긴장해본 사람만이 진정한 이완을 누릴 수 있다. 당겨진 활시위만이 이완될 수 있다.
p.87

"어느 소설가가 그랬다잖아요. '왜 책을 읽어야 하냐고 묻는다면, 남이 침범할 수 없는 내면을 갖기 위해서라고 생각해요'라고. 제 농담은 그 말에 대한 각주 아닐까요? 그언론인의 내면에 깃든 시란, 설익은 국가가 폭력을 휘두른다고 파괴할 수 있는 게 아니죠."
p.107

소멸에는 어떤 예외도 없다. 어떤 존재를 지탱했던 조건이 사라지면 그 존재도 사라진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소멸의 여부가 아니라 소멸의 방식이다.
p.125

파국을 넘어, 사회적 삶은 의외로 오래 지속된다. 사회적 삶이 지속되는 동안은 공적인 의미를 확정할 수 없기에 역사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역사는 사회에 대해 죽음이 삶에 행하는 것과 같은 역할을 한다.
p.137

실로 사람들은 과거에 존재했던 것만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한 번도 존재해본 적이 없는 것도 그리워한다. 부재를 견디고 그리워하는 것으로 소진되는 생.
p.186

사실 어쩌면 우리가 인생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진정한 판단과 선택은 아이를 낳을 것인가 말 것인가의 결정뿐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떤 환경 속으로 자신의 선택과 무관히 떨어진다. 물론 우리는 그 속에서 살면서 나름대로 자잘한 판단들을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미 주어져있는 커다란 삶의 조건 속에서의 선택들이다. 사실 그 조건 자체에 대한 선택과 판단은 배제되어 있다. 새로운 생명을 이 세계에 들어서게 할 것인가 하는 판단이야말로 유일하게 그 조건에 대한 판단일 수 있다. 비록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그 조건이 가진 경우의 수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그 삶이라는 조건을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이분법적 판단에 불과하긴 해도, 그것은 정말 유일한, 조건 자체에 대한 판단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아이의 출산은 적어도 그 순간까지의 자신이 살아온 생에 대한, 세상에 대한 평가의 순간이기도 한 것이다.
p.254

이 자리는 의미 추구의 연역적 답을 얻는 세계라기보다는 그 질문을 잊는 공간이다. 그 질문을 잊음을 통해 애초에 가졌던 의문을 해소한다. 이 스스로 그러한 세계. 이것도 신의 한 이름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신이라는 개념에 좀 더 너그러워진다면 말이다. 혹은 이성도 그 안에 안거하고 있는지 모른다.
p.259

영화는 아마도 우리가 실제로 밤에 꾸는 꿈의 형태와 가장 가깝다 할 것이다. 밤만으로는 부족하여 대낮에도 꿈을 꾸고자 하는 자들은 오늘도 극장으로 향하여 마음 저 깊숙이 보고 싶었던 것들을 스크린 위에서 본다.
...
우리에게 영화는 무엇일 수 있는가? 이 세상 것이면서 이 세상 것이 아닌 것들에 사람들이 열광한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이 날것으로서의 세상을 못 견뎌하고 있다는 증좌라고, 나는 본다.
p.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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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추석, 칼럼 한 편을 읽고는 자지러졌다. 모든 종류의 명절 잔소리에 응대할 수 있는, 철학적이고 본질적인 매뉴얼이 담긴 글이었는데 특유의 톡톡 튀는 문체 덕에 한 문장을 넘어가지 못하고 문장마다 거듭 매료됐기 때문이다. 흔히 만날 수 있는 필력이 아니었다.
(추석이란 무엇인가: https://news.v.daum.net/v/20180921193231682)
그 칼럼의 필자가 냈다는 책이어서, 또 제목이 너무 마음이 들어서 기꺼이 읽은 책이다.

사실 칼럼 모음집을 좋아하지 않는다. 칼럼이란 신문 지면에서, 그날의 사회와 흐름에 부대끼며 역동할 때 제 가치를 다 보여주는 법이니까. 모음집 속으로 한데 묶인 칼럼들은 대개 그 힘을 잃는다. 때로는 뜬금없게 느껴지기도 하고, 글의 완결성은 떨어져 보이기도 한다. 또 필자의 글쓰기 습관이나 패턴이 눈에 들어오면서 매력이 시들해지기도 한다. 칼럼 모음집 때문에 존경하던 칼럼니스트에 대한 마음이 식어버린 기억들이 제법 있다.

이 책 역시 칼럼 모음집 특유의 한계를 전부 피해가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다른 여느 칼럼 모음집들보다 마음에 들었다. 여기 실린 글들을 관통하는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그 몇년을 오늘 돌아보는 것의 의미를 제목이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월호 이후의 아픔들, 온 사회가 죽음을 생각해야만 했던 시간들, 한국 현대 정치의 무덤 같던 나날들. 좌절로 치닫던 사회에선 그럼에도 촛불이 타올랐고, 아침이라고 할 만한 것이 밝았다. 단지 그 지난 날들과 비교하자면 말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러했듯이 사람들은 쉽게 잊고 사회는 다시 분열하고 갈등한다. 그런 때에 죽을 고비 뒤로 이어지는 삶과 같은 시대를 생각한다면, 혹시 어떻게든 버티고 나아갈 힘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잠시 잊었던 아주 가까운 역사를 이 책에 담긴 글들로 다시 곱씹을 수 있었다. 그걸로 됐다.

이 교수님이 타고난 글 천재라는 것을 온 천하에 뽐내는 것만 같은 주옥같은 영화 평론은 덤이다.
질투난다. 천재들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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