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조현욱 옮김/김영사
중간에서 꼭대기로 단숨에 도약한 것은 엄청난 결과를 낳았다.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있던 다른 동물, 예컨대 사자나 상어는 수백만 년에 걸쳐 서서히 그 지위에 올랐다. 그래서 생태계는 사자나 상어가 지나친 파괴를 일으키지 않도록 견제와 균형을 발달시킬 수 있었다.
...
이에 비해 인간은 너무나 빨리 정점에 올랐기 때문에, 생태계가 그에 맞춰 적응할 시간이 없었다. 게다가 인간 자신도 적응에 실패했다.
p.30-31
인지혁명 이후, 사피엔스는 이중의 실재 속에서 살게 되었다. 한쪽에는 강, 나무, 사자라는 객관적 실재가 있다. 다른 한쪽에는 신, 국가, 법인이라는 가상의 실재가 존재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가상의 실재는 점점 더 강력해졌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강과 나무와 사자의 생존이 미국이나 구글 같은 가상의 실재들의 자비에 좌우될 지경이다.
p.60
자연의 질서는 안정된 질서다. 설령 사람들이 중력을 믿지 않는다 해도 내일부터 중력이 작용하지 않을 가능성은 없다. 이와 반대로 상상의 질서는 언제나 붕괴의 위험을 안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화에 기반하고 있고, 신화는 사람들이 신봉하지 않으면 사라지기 때문이다. 상상의 질서를 보호하려면 지속적이고 활발한 노력이 필수적이다. 이런 노력 중 일부는 폭력과 강요의 형태를 띤다. 군대, 경찰, 법원, 감옥은 사람들이 상상의 질서에 맞춰 행동하도록 강제하시면서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다.
p.167
사람들로 하여금 기독교나 민주주의, 자본주의 같은 상상의 질서를 믿게 만드는 방법은 무엇일까? 첫째, 그 질서가 상상의 산물이라는 것을 결코 인정하지 않아야 한다. 사회를 지탱하는 질서는 위대한 신이나 자연법에 의해 창조된 객관적 실재라고 늘 주장해야 한다. 사람이 평등하지 않은 것은 함무라비가 그렇다고 해서가 아니라 엔릴과 마르두크가 그렇게 명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평등한 것은 토머스 제퍼슨이 그렇게 말해서가 아니라 신이 그렇게 창조했기 때문이다. 자유시장이 최선의 경제체제인 것은 애덤 스미스가 그렇다고 말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불변의 자연법칙이기 때문이다.
p.169-170
상상의 질서를 빠져나갈 방법은 없다. 우리가 감옥 벽을 부수고 자유를 향해 달려간다 해도, 실상은 더 큰 감옥의 더 넓은 운동장을 향해 달려나가는 것일 뿐이다.
p.177
쓰기는 인간의 의식을 돕는 하인으로 탄생했지만, 점점 더 우리의 주인이 되어가고 있다. 컴퓨터는 호모 사피엔스가 어떻게 말하고 느끼고 꿈꾸는지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래서 우리는 호모 사피엔스에게 컴퓨터가 이해할 수 있는 숫자 언어로 말하고 느끼고 꿈꾸라고 갈치고 있다.
p.195
그러므로 인간의 경제사는 미묘한 춤과 같다. 사람들은 이방인과의 수월한 협력을 위해서 돈에 의존하지만, 그것이 인간적 가치와 친밀한 관계를 손상시킬까 봐 두려워한다. 한편으로는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돈과 상업의 이동을 막아온 공동체라는 댐을 기꺼이 파괴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와 종교의 환경이 시장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막아줄 댐을 건설한다.
p.268
인류의 모든 문화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제국과 제국주의 문명의 유산이며, 어떤 학술적, 정치적 외과수술을 한다 해도 환자를 죽이지 않고 제국의 유산만을 도려낼 수는 없다.
p.291
요약하면, 일신론은 질서를 설명하지만 악 앞에서 쩔쩔맨다. 이신론은 악을 설명하지만 질서 앞에서 당황한다. 이 수수께끼를 해결하는 논리적 방법이 하나 있다. 온 우주를 창조한 전능한 유일신이 있는데 그 신이 악한 신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신앙을 가질 배짱이 있는 사람은 역사상 아무도 없었다.
p.314
사실 일신론은 역사에서 나타났듯이 일신론과 이신론, 다신론, 애니미즘 유산이 하나의 신성한 우산 밑에 뒤섞여 있는 만화경이다. 보통 기독교인은 일신론의 하느님만이 아니라 이신론적 악마, 다신론적 성자, 애니미즘적 유령을 모두 믿는다. 종교학자들은 이처럼 서로 다르고 심지어 상충하는 사상을 동시에 인정하는 행외와 각기 다른 원천에서 가져온 의례와 관례를 혼합하는 행위에 대한 명칭으로, '제설(諸說)혼합주의'를 썼다. 실제로 제설혼합주의야말로 단 하나의 위대한 세계 종교일지 모른다.
p.317
물리학이나 경제학과 달리, 역사는 정확한 예측을 하는 수단이 아니다. 역사를 연구하는 것은 미래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다. 우리의 현재 상황이 자연스러운 것도 필연적인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그 결과 우리 앞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p.342
과학혁명은 지식혁명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무지의 혁명이었다. 과학혁명을 출범시킨 위대한 발견은 인류는 가장 중요한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모른다는 발견이었다.
p.356-357
낙관주의자와 비관주의자 모두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다음과 가티 결론 내릴 수도 있겠다. 우리는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는 갈림길에 서 있다. 한쪽으로 난 문과 다른 쪽으로 열린 입구 사이에서 초조하게 오락가락하고 있다. 역사는 우리의 종말에 대해 아직 결정 내리지 않았으며, 일련의 우연들은 우리를 어느 쪽으로도 굴러가게 만들수 있다.
p.529
또 다른 가능성은, 행복이란 불쾌한 순간을 상쇄하고 남는 여분의 즐거움의 총합이 아니라, 그보다는 개인의 삶을 총체적으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으로 바라보는 데서 온다는 것이다. 행복에는 중요한 인지적, 윤리적 요소가 존재한다.
p.552
현대는 역사상 처음으로 모든 인간이 기본적으로 평등하다는 사실을 인정한 시대이며, 사람들은 이 사실을 자랑스러워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역사상 유례없는 불평등을 창조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다.
p.580
우리는 새로운 특이점에 빠른 속도로 접근하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 세계에 의미를 부여했던 모든 개념-나, 너, 남자, 여자, 사랑, 미움-이 완전해 무관해지는 지점 말이다. 그 지점을 넘어서 벌어지는 일들은 그게 무엇이든 우리에게 아무 의미도 없다.
p.582
우리는 머지않아 스스로의 욕망 자체도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마도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진정한 질문은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가?"가 아니라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일 것이다. 이 질문이 섬뜩하게 느껴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이 문제를 깊이 고민해보지 않은 사람일 것이다.
p.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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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입체적인 사유를 할 수 있는 능력이 부럽다. 역사학의 저력이 느껴진다. 인류를 바라보는 시선이 참신하고 그 사유의 깊이를 쉬운 말로 풀어내는 능력이 탁월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곳곳이 왜 아픈지, 힘든지, 이제까지 어땠고 앞으로는 어떠할지, 뭘 준비하고 고민해야 하는지 명료한 해설과 질문들을 던져줬다.
인간은 정말 고난을 향해 진화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는것이 힘인지, 모르는 것이 약인지 생각해 볼때 후자는 아닐런지. 욕망 자체마저 설계해야하는 말세가 오면, 우리 세계에 의미를 부여한 모든 개념이 붕괴한 그 시대가 오면 과연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할 것인지. 길가메시 프로젝트를 통한 장수는 과연 더 나은 미래, 행복한 미래를 가져다줄까?
내가 상상의 질서보다는 신을 믿는 인간이라 다행이다. 상상의 질서로 향하는 믿음은 쉽게 흔들리는데, 아무래도 신을 향한 믿음은 꽤나 견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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