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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경, 공터의 사랑

공터의 사랑 허수경 한참 동안 그대로 있었다 썩었는가 사랑아 사랑은 나를 버리고 그대에게로 간다 사랑은 그대를 버리고 세월로 간다 잊혀진 상처의 늙은 자리는 환하다 환하고 아프다 환하고 아픈 자리로 가리라 앓는 꿈이 다시 세월을 얻을 때 공터에 뜬 무지개가 세월 속에 다시 아플 때 몸 얻지 못한 마음의 입술이 어느 풀잎자리를 더듬으며 말 얻지 못한 꿈을 더듬으리라 허수경, <혼자 가는 먼 집> 문학과지성 시인선 118 = 공터에 무지개를 띄우고, 잊었던 꿈을 앓는 일

잊기 좋은 이름, 김애란

잊기 좋은 이름 김애란 / 열림원 그런데 그 외 나머지 말, 나머지 기억, 나머지 내 봄, 내 어둠, 당신의 계절은 모두 어디 갔을까. 어쩌면 그것들은 영영 사라진 게 아니라 라디오 전파처럼 에너지 형태로 세상 어딘가를 떠돌고 있지는 않을까. 그러다 드물게 주파수가 맞는 누군가의 가슴에 무사히 안착하고, 어긋나고, 보다 많은 경우 버려지고, 어느 때는 이렇게 최초 송출지로 돌아와 보낸 이의 이름을 다시 묻는 건지도. p.43 그 문학은 하나의 선을 편드는 문학이 아니라, 이제 막 사람들 앞에 선 당선자의 허영, 그 헛폼 안에서조차 삶의 이면을 비출 수 있는 뭔가가 있다고 손들어주는, 여러 개의 팔을 가진 문학이었다. 그 팔 안에서 나는 여전히 실수하고, 깨닫고, 배우면서 살아간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전부 까맣게 잊어버릴 정도로 어리석어, 같은 실수를 다시 하며 살아간다. 말과 글의 힘 중 하나는 뭔가 '그럴' 때, 다만 '그렇다'라고만 말해도 마음이 괜찮아지는 신비에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팔이 많아 아름다운 문학을 이따금 상상하며 말이다. p.52 아는 이야기를 다 쓰면 그 다음엔 어떤 글을 지어야 하나 근심한 적이 있다. 바보같이 몸도 글도 한결같을 거라 생각하던 때의 일이다. 단어 하나가 몸을 완전히 통과한 후에는 그 전과 전혀 다른 뜻이 된다는 걸 몰랐다. 안다고 믿었던 말, 쉽게 끄덕인 말, 남몰래 버린 말....... 스러진 푯말을 따라 지나온 길을 다시 돌아갈 때면 이따금 몹시 늙은 얼굴을 한 서사들이 멀찍이서 손짓하며 서 있기도 했다. p.124 언젠가 두보가 쓴 저 <곡강>을 두고 학생들에게 얘기한 적이 있다. 단순히 '꽃잎이 떨어진다'라고 생각하는 삶과 그렇게 떨어지는 꽃잎 때문에 '봄이 깎인다'라고 이해하는 삶은 다르다고. 문학은 우리에게 하나의 봄이 아닌 여러 개의 봄을 만들어주며 이 세계를 더 풍요롭게 감각할 수 있게 해준다고.

버스정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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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날개로 날아와 한동안 머물던 너를 버스에 데리고 탈 수는 없어서 황급히 쫓아보냈네 여름이 끝나버렸네 2019. 08. 31.

이장욱, 꽃잎, 꽃잎, 꽃잎

꽃잎, 꽃잎, 꽃잎 이장욱 무섭다 결국 그곳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무섭다 마음이 무섭고 몸이 무섭고 싹 트고 잎 피고 언제나 저절로 흐드러지다가 바람 불어 지는 내 마음속 꽃잎 꽃잎, 그대가 무섭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하나의 육체로만 살아왔으므로 아주 정교하게 정렬해 있는 하나의 고요한 세상을 지니고 있으니, 무섭다 그러나 나는 나를 이끄는 매혹에 최선을 다해 복종하였으므로 내 고요한 세상에 피고 지는 아름다운 모반을 주시하였다 그대가 처연히 휘날려 내 몸과 마음이 어지러울 때 단 한번도 나는 봄 여름 가을 겨울 흘러가는 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으므로 기억을 만나면 기억을 죽이고 불안을 만나면 불안을 죽이고, 그러므로 이제 이 눈과 코와 입과 귀를 막아 새로운 세상을 보게 하시길 그대에게 익숙한 세상으로 나를 인도하여 그대 몸과 마음에 피고 지는 싹과 잎과 꽃이 되게 하시길 너무 오랫동안 하나의 육체로만 살아왔으므로 아주 정교하게 정렬해 있는 이 고요한 세상을 처연히 흩날리도록, 내 몸과 마음의 꽃잎 꽃잎 피고 지는 그곳에 기다리는 이 아무도 없을지라도 이장욱 시집, <내 잠 속의 모래산> 민음의 시 111 = 이미 흐드러진 마음을 지키기 위해 의심 없이 흔들림 없이 기억과 불안을 죽이며 견디는 것. 나약하나 고귀하다.

한강, 새벽에 들은 노래 3

새벽에 들은 노래 3 한강 나는 지금 피지 않아도 좋은 꽃봉오리거나 이미 꽃잎 진 꽃대궁 이렇게 한 계절 흘러가도 좋다 누군가는 목을 매달았다 하고 누군가는 제 이름을 잊었다 한다 그렇게 한 계절 흘러가도 좋다 새벽은 푸르고 희끗한 나무들은 속까지 얼진 않았다 고개를 들고 나는 찬 불덩이 같은 해가 하늘을 다 긋고 지나갈 때까지 두 눈이 채 씻기지 않았다 다시 견디기 힘든 달이 뜬다 다시 아문 데가 벌어진다 이렇게 한 계절 더 피 흘려도 좋다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438 = 밤마다 뜬눈으로 피흘리는 마음 바닥에는 어떤 아픔이 있는 걸까.  덤덤한듯 절제된듯 지르는 비명같은 목소리.

이제니, 코다의 노래

코다의 노래 이제니 손을 씻자 낯빛이 검어졌다. 내 어둠의 깊이를 헤어리는 밤. 오래된 망상과 코카콜라와 데스메탈과 카발라와 차오르는 귓구멍의 물기와 너와 나의 아득한 피킹 하모닉스. 나의 기타는 너무 많은 심장을 가진 것처럼 끊어지기 직전의 팽팽한 긴장으로. 새끼손가락이 짧은 나의 운지법은 더듬더듬 춤추듯 절룩거리고. 적막이란 적막 이전에 소리가 있었다는 말. 너무 많은 심장이 우리를 질식하게 한다. 생각한 그대로 끝에서 끝까지 밀고 나아가려 했던 것이 우리의 때아닌 조로의 이유. 너는 사각형의 소녀처럼 울었고 그 뾰족한 모서리가 무심히 나를 찔렀다. 뜬눈으로 꿈속을 들락거리다 다시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시적인 문장을 찾으려 할 때마다 죄를 짓는 기분. 조금도 시적이지 않은 언어의 빙판 위에서 나 자신과 분리된 불안은 시적으로 미끄러지고. 당분간은 자살하지 않을 거라는 어제와 다를 바 없는 다짐을 하고. 이곳은 너무 어둡고 너의 개념은 모질고 한번도 내가 원한 자리에 놓여 있었던 적이 없고. 데크레센도 데크레센도 코다의 노래. 내가 바라는 건 아주 작고 희미한 것들뿐. 단 한 순간도 나 자신으로부터 달아나지 않는 것. 매순간 초연해지길 바라지만 혁명을 하기엔 책을 너무 많이 읽었고 풍경을 읊기엔 양심이 허락하지 않고 너는 또다시 성냥을 긋듯 손목을 긋고. 마음으로 악담을 퍼붓고 돌아서전 시절. 속쓰림과 배고픔과 후회와 반서이 아코디언 주름처럼 펼쳐졌다 접히기를 반복하고. 내겐 더이상 날개가 없다. <아마도 아프리카> 창비시선321 창비 =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클라이막스여서 가장 완성도 높은 에필로그가 된다.  계속 더 나은 문장을 향해 나아가려는 갈증 같은 것이 담겼다.

김선우, 花飛, 먼 후일

花飛, 먼 후일 김선우 그날이 돌아올 때마다 그 나무 아래서 꽃잎을 묻어주는 너를 본다 지상의 마지막 날까지 너는 아름다울 것이다 네가 있는 풍경이 내가 살고 싶은 몸이니까 기운을 내라 그대여 만 평도 백 평도 단 한 뼘의 대지도 소속은 같다 삶이여 먼저 쓰는 묘비를 마저 써야지 잘 놀다 갔다 완전한 연소였다 김선우 시집 <녹턴> 문학과지성 시인선 483 = 사랑과 죽음 사이에 흐르는 차원 다른 몽환의 시간, 거기 미리 바친 애도의 노래들. 마지막 순간에 이토록 군더더기 없이 아름다운 말을 남기고 날아가는 꽃과 같이 갈 수 있다면.

김선우, 소울메이트

소울메이트 김선우 1 반쪽 빛을 찾아 헤메는 것이 아니라 반쪽 어둠을 찾아 영접하는 것이다. 영혼은 본래부터 완전하였다. 2 영혼의 혈거 그 바닥엔 우주먼지로 지어진 밥상 하나 그 위엔 먼지의 밥 한 그릇 숟가락 두 개 바라보며 나누어 먹으며 가끔 입가를 닦아주며 김선우 시집 <녹턴> 문학과지성 시인선 483 = 첫 행에서 쿵 했다. 완전한 영혼을 부수면서까지 어둠을 귀하게 끌어안는 것.

내게 무해한 사람, 최은영

내게 무해한 사람 최은영 / 문학동네 <지나가는 밤> 어린 시절은 다른 밀도의 시간 같다고 윤희는 생각했다. 같은 십 년이라고 해도 열 살이 되기까지의 시간은 그 이후 지나게 되는 시간과는 다른 몸을 가졌다고. 어린 시절에 함께 살고 사랑을 나눈 사람과는 그 이후 아무리 오랜 시간을 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끝끝내 이어져 있기 마련이었다. 현실적으로 서로 아무 관계 없는 사람들로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무료하고 긴 하루하루로 이어진 시간, 아무리 노래를 부르고 그네를 타도, 공상에 빠져 이야기를 지어내도, 자신들이 작가이고 감독이고 배우이고 관객인 연극을 해도, 갈 수 있는 한 가장 먼 거리까지 달려간다고 해도 메워지지 않았던 커다랗고 텅 빈, 그 무용한 시절을 함께했다는 이유만으로. P. 97 얼마를 기다리든 결국 엄마는 왔다. 엄마 손을 잡고 집으로 걸어가던 길, 늘 엄마를 만날 수 있었던 그때의 기다림을 윤희는 아프게 기억했다. 어른이 된 이후의 삶이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것들을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윤희야, 온 마음으로 기뻐하며 그것을 기다린 자신을 반갑게 맞아주고 사랑해주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P. 99 <모래로 지은 집> 모래는 사람을 무턱대고 의심하거나 나쁘게 보려 하지 않았다. 무엇이든 전전긍긍하지 않고 애쓰지 않았다. 관대했다. 그 관대함은 더 가진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태도라고 그때의 나는 생각했다. 비싼 자동차나 좋은 집보다도 더 사치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P. 118 그때 나는 사랑이라는 말이 참 더럽다고 생각했어. 더러운 말이라고. 사랑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사람을 경멸하고 또 경멸할 거라고 다짐했어. 나는 사람이 사랑한다는 것을 알지 못해. 어쩌면 사랑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무서운 일이라고, 두려운 일이라고 생각해.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알리바이로 아무 짓이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P. 156 그때 나는 공무와 포옹하고

박준, 세상 끝 등대 3

세상 끝 등대 3 박준 늘어난 옷섶을 만지는 것으로 생각의 끝을 가두어도 좋았다 눈이 바람 위로 내리고 다시 그 눈 위로 옥양목 같은 빛이 기우는 연안의 광경을 보다 보면 인연보다는 우연으로 소란했던 당신과의 하늘을 그려보는 일도 그리 낯설지 않았다 박준,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519 = 그 모든 우연이 인연의 근거라고 믿었는데 이 시를 읽는 순간 그게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소란한 우연에 들뜬 채 내달린 것일 뿐이었을까 싶어 쓸쓸해졌다. 

스토리텔링 애니멀, 조너선 갓셜

스토리텔링 애니멀 조너선 갓셜 / 노승영 옮김 / 민음사 우리가 셰익스피어 연극을 관람하며 영화를 보고 소설을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케설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는 우리의 정신을 확장하거나, 인간 조건을 탐구하거나, 숭고한 일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뿅 가기 위해서이다. p.51 따라서 이 논리를 따르자면 우리가 이야기를 추구하는 것은 이야기를 즐기기 때문이지만, 이야기를 즐기도록 자연이 우리를 설계한 이유는 연습의 유익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픽션은 인간의 문제를 시뮬레이션 하는 데 특화된 아주 오래된 가상 현실 기술이라는 것이다. p.85 꿈의 학문적 정의는 "서사 구조가 있는 감각 운동의 환각"이다. 꿈은 사실상 밤의 이야기이다. p.99 제임스 틸리 매슈스의 터무니없는 환상에서 보듯 병든 마음은 감각을 복잡하게 짜 맞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 우리의 마음 또한 감각을 통해 들어오는 자료로부터 의미를 추출해 내려고 끊임없이 애쓴다. 정신이 멀쩡한 사람이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편집성 정신 분열병 환자의 이야기처럼 극적으로 일탈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곧잘 일탈한다. 이것은 이야기하는 마음을 얻은 대가이다. p.126 이야기하는 마음은 중대한 진화적 적응이다. 그 덕에 우리는 사럼을 일관되고 질서 정연하고 의미있게 경험한다. 삶이 지독하고 소란스러운 혼란에 머물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이야기하는 마음은 완벽하지 않다. ... 이야기하는 마음은 의미 중독자이다. 이야기하는 마음은 세상에서 의미 있는 패턴을 찾아내지 못하면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려 든다. 한마디로 이야기하는 마음은 진실을 말할 수 있을 때는 진짜 이야기를, 그럴 수 없을 때는 가짜 이야기를 제조하는 공장이다. p.133 달리 말하자면, 미래처럼 과거도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둘 다 마음속에서 창조한 환상이다. 미래는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머릿속에서 돌리는 확률 시뮬레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 심보선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 심보선 / 문학동네 그러나 나는 글을 쓰면서 - 그것이 시건 혹은 논문이건 - 깨닫게 되었다. 내가 선택하고 빠져드는 대상은 단순히 주제가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인간들의 탄식, 좌절, 환호성, 기쁨, 경탄이 어려 있는 세계라는 것을. 그리하여 내가 이 세계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그 세계를 부각시키는 것이고, 그 세계와 연루된다는 것이고, 그 세계에 참여한다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아버지와 베버가 말하듯 삶과 글쓰기는 고독한 작업으로 시작하여 고독한 작업으로 돌아올지 모른다. 그러나 그 출발과 회귀 사이에는 고독한 여정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나의 몸과 영혼을 뜨겁게 하고, 내 가슴 속에서 말을 들끓게 하고, 나의 손발을 움직이게 하는 힘은 단순히 주제의 흥미로움이 아니라 바로 동시대인들의 삶이고 그 삶에 섞여드는 사물들의 동시대적 운동이다. p.08-09 그렇다. 결국 모든 것은 영혼의 문제여야 한다. ... 영혼은 행복의 문제와 연결된다. 그러나 영혼은 행복을 귀중한 선물처럼 안절부절 다루지 않는다. 영혼은 불행에게도 손을 건넨다. 그리하여 영혼은 불행과 행복의 차이를 지우고 그 둘을 동등하게 만든다. ... 영혼은 의미와 무의미를 같은 장소로 데려온다. 영혼은 '행복하지만 삶의 의미에 무지한 아이'와 '불행하지만 삶의 의미에 도통한 노인'을 합체시켜서 새로운 인간을 탄생시킨다. 영혼은 오늘 속으로 과거와 미래를 수렴시켜서 새로운 시간을 창조한다. 영혼 속에서 인간은 언제나 새로워진다. ... 영혼은 어쩌면 허튼소리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허튼소리다. 영혼은 불가능성에 대한 가장 경이로운 역설이요, 가장 아름다운 역설이다. 이 수수께기 같은 영혼 때문에 나는 웃다가 울고 울다가 웃는다. 영혼 때문에 나는 시를 쓰고 시를 산다. p.22 일상생활에서의 '깊이 생각함'일나, 느긋하게 산책을 할 때라면 한 송이 꽃을 보고도 쉽게 느낄 공통성의 기초를, 생존

허수경, 불취불귀

불취불귀 허수경 어느 해 봄그늘 술자리였던가 그때 햇살이 쏟아졌던가 와르르 무너지며 햇살 아래 헝클어져 있었던가 아닌가 다만 마음을 놓아보낸 기억은 없다 마음들끼리는 서로 마주 보았던가 아니었는가 팔 없이 안을 수 있는 것이 있어 너를 안았던가 너는 경계 없는 봄그늘이었는가 마음은 길을 잃고 저 혼자 몽생취사하길 바랐으나 가는 것이 문제였던가, 그래서 갔던 길마저 헝클어뜨리며 왔는가 마음아 나 마음을 보내지 않았다 더는 취하지 않아 갈 수도 올 수도 없는 길이 날 묶어 더 이상 안녕하기를 원하지도 않았으나 더 이상 안녕하지도 않았다 봄그늘 아래 얼굴을 묻고 나 울었던가 울기를 그만두고 다시 걸었던가 나 마음을 놓아 보낸 기억만 없다 허수경, <혼자 가는 먼 집> 문학과지성 시인선 118 = 잔뜩 취한 채 봄의 끝자락을 비틀거리는 것 같은 애달픔이었다.  완전히 무너진채로 미친듯이 써내려갔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된 시인 언니와 한잔 기울이고 싶었다. 특히 이 시를 여러번 읽었다. 동사서독을 영화관에서 보던 날의 기억들이 비틀비틀 마음속을 헤집고 돌아다녔다. 

박준, 우리들의 천국

우리들의 천국 박준 곁을 떠난 적이 있다 당신은 나와 헤어진 자리에서 곧 사라졌고 나는 너머를 생각했으므로 서로 다른 시간을 헤매고 낯익은 곳에서 다시 만났다 그 시간과 공간 사이, 우리는 서로가 없어도 잔상들을 웃자라게 했으므로 근처 어디쯤에는 그날 흘리고 온 다짐 같은 것도 있었다 박준,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519 = 우리를 우리라고 할 수 있을지, 천국을 천국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낱말 하나하나가 사무쳐서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한강, 회복기의 노래

회복기의 노래 한강 이제  살아가는 일은 무엇일까 물으며 누워 있을 때 얼굴에  햇빛이 내렸다 빛이 지나갈 때까지  눈을 감고 있었다 가만히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438 = 아주 오랜 시간을 물으며 누워있었구나 생각했다가 이것이 회복기의 노래라면, 하루 해가 가기 전에 회복했다는 얘기 같아서 그 빠른 회복탄력성에 질투를 느꼈다.

보통의 존재, 이석원

보통의 존재 이석원 / 달 그것이 우리의 시작이었다. 시간은 흘렀고 마침내 모든 인연은 소멸하였다. 함께 보낸 시간들은 묻혀 화석이 되거나 기억과 함께 사라져갈 형편이 되었다. P.15 나는 내가 본 아름다운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귀한 것. 오직 너에게만 보여주고 싶은 것. P.23 아무도 없는 세상에 나 홀로 있다가 아무도 없는 세상에 둘이서만 있게 되는 게 연애입니다. 그래서 연애를 해도 외롭지 않게 되는 건 아니지요. 아무도 없는 세상에 기껏해야 한 사람이 더 생기는 것에 불과하니까. 찬욱이 형은 이 영화에 내가 알지도 못할 무수한 것들을 담으셨겠지만 내게는 이 부분이 유독 가슴에 남을 것 같습니다. 비록 제가 뱀파이어가 되어본 적은 없지만 그런 깜깜 낭떠러지에 둘이서만 서본 경험이 있거든요. P.72 현실은 고통스럽고 꿈속의 사막은 달콤하다. 그렇기에 나는 사막을 꿈꾸는 노래를 짓고 부른다. 고통이 아니었던들 내게 평화로운 삶 같은 것들이 의미를 가질 수 있었을까. 생의 중요한 것들이 이처럼 고통 속에서 주어진다는 사실이 내겐 아직도 낯설게 느껴진다. P.93 생각해보면 살아가면서 내가 정말 사랑해야 하는 것들은 하나같이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들뿐입니다. ... 인생이라는 게임이 왜 이렇게 모순되고 불공평한지 38년을 살아왔지만 아직 잘 모릅니다. 다만 분명한 건 인생이란 사랑할 대상을 골라서 사랑하도록 허용하지는 않는다는 것 뿐. 그러나 그 불공평함이 결국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을 보면, 게임의 승부는 누가 하루라도 더 빨리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을 긍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에 달려 있는지도 모릅니다. ... 그러나 해답을 알 수 없는 오랜 물음을 던진 끝에 어느 날, 내가 그토록 달아나고 싶고 회의하던 것들로부터 나와 내 삶이 이루어져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받아들인 순간, 나의 모든 아쉬움들은 그제야 비로소 위대한 유산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바로 잘나지 않은 내

이제니, 남겨진 것 이후에

남겨진 것 이후에 이제니 흰 집 건너 흰 집이 있어 살아가는 냄새를 희미하게 풍기고 있다. 거룩한 말은 이 종이에 어울리지 않아서 나 자신도 읽지 못하도록 흘려서 쓴다. 하늘은 어둡고 바닥은 무겁고, 나는 다시는 오지 않을 사람을 가지게 되었고, 너는 말할 수 없는 말을 내뱉고 읽히지 않는 문장이 되었다. 낮잠에서 깨어나 문득 울음을 터뜨리는 유년의 얼굴로. 마음과 물질 사이에서 서성이는 눈빛으로 인간 저 너머의 음역으로 움직이고 움직이면서. 돌보는 말과 돌아보는 말 사이에서 밀리는 마음과 밀어내는 마음 사이에서 사랑받은 적 없는 사람이 모르는 사이 하나하나 감정을 잃어버리듯이, 한밤의 고양이와 친해진 것은 어느 결에 사람을 저버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냥 사람이라는 말. 그저 사랑이라는 말. 그러니 너는 마음 놓고 울어라. 그러니 너는 마음 놓고 네 자신으로 존재하여라. 두드리면 비춰 볼 수 있는 물처럼. 물은 단단한 얼굴을 가지고 있어서. 남겨진 것 이후를 비추고 있었다.  이제니,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문학과지성 시인선 520 = 어떤 기억에 대해서, 나 대신 쓴 것만 같은 시. 단단한 얼굴에 비추어진 이후는 어떠한가.

신철규, 눈물의 중력

눈물의 중력 신철규 십자가는 높은 곳에 있고 밤은 달을 거대한 숟가락으로 파먹는다 한 사람이 엎드려서 울고 있다 눈물이 땅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막으려고 흐르는 눈물을 두 손으로 받고 있다 문득 뒤돌아보는 자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갈 때 바닥 모를 슬픔이 눈부셔서 온몸이 허물어질 때 어떤 눈물은 너무 무거워서 엎드려 울 수 밖에 없다 눈을 감으면 물에 불은 나무토막 하나가 눈 속을 떠다닌다 신이 그의 등에 걸터앉아 있기라도 하듯 그의 허리는 펴지지 않는다 못 박힐 손과 발을 몸안으로 말아넣고 그는 돌처럼 단단한 눈물방울이 되어간다 밤은, 달이 뿔이 될 때까지 숟가락질을 멈추지 않는다 신철규,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문학동네 시인선 096 = 너무 무거워서 엎드려 울 수밖에 없는 슬픔.  손으로 눈물을 받으며 엎드려 우는 누군가의 모습을, 생전엔 만난 적 없던 어린 영혼들의 빈소에서 밤마다 매일 보아야 했던 때가 있었다.  신은 어쩌면 그 등마다 걸터앉아 있거나 땅으로 스미는 눈물을 함께 받치고 있었을텐데, 그들은 도대체 신이 어디에 있느냐고 단단히 울었을 것이었다.  자려고 누워도 귀에서 울음소리가 떠나지 않던 날들이었다.

한강, 서시

서시 한강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 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 당신, 가끔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 라고 말하게 될까. 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당신과 언제나 함께였다는 것을 알겠어, 라고. 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 당신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후회했는지 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이 애쓰고 끝없이 집착했는지 매달리며 눈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며 때로는 당신을 등지려고도 했는지 그러니까 당신이 어느 날 찾아와 마침내 얼굴을 보여줄 때 그 윤곽의 사이 사이, 움푹 파인 눈두덩과 콧날의 능선을 따라 어리고 지워진 그늘과 빛을 오래 바라볼 거야. 떨리는 두 손을 얹을 거야. 거기, 당신의 뺨에, 얼룩진.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438 =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리라는 확신. 이 시집의 평론에는 막스 파카르트의 말이 적혀 있었다. “시를 쓴다는 것은 자신 안의 심연 위로 훌쩍 뛰어오르는 것이다. 시인은 시를 쓰면서 심연을 잠재우고, 심연에게 자장가를 불러준다.”

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 마쓰이에 마사시

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 마쓰이에 마사시/ 권영주/ 비채 우리는 오래 사귄 사이였다. 일단 그렇게 되고 나면 망설이지도, 살피지도 않는다. 우리 둘에게 남아 있던 기억이 잇따라 흘러넘쳤다. 우리에게는 신호도, 확인도, 승낙도 필요 없었다. 그로부터 이어진 나날에 나는 잘 마른 장작처럼 화르르 타올라 연기를 뿜었다. 온몸 구석구석이 행복했다.  P.196-197 얼마 동안, 심지어 한 달 동안이라도 깊이 맺어져 있었다면 기억은 언제까지고 남는다. 말이 아니라 마음과 피부의 기억으로. P.198 = 선물 받은 책인데, 제목이 묘하게 마음에 들었다.  어떻게 보면 아주 쓸쓸한 이야기인데 집과 고양이에 대한 묘사 때문에 온기가 느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9 제10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2019 제10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박상영/ 김희선/ 백수린/ 이주란/ 정영수/ 김봉곤/ 이미상 문학동네 그가 나에게 (어떤 의미에서든)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단지 벽에 대고서라도 무슨 얘기도 털어놓고 싶을 만큼 외로운 사람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는 그런 외로운 마음의 온도를, 냄새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때의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P.24 사랑은 정말 아름다운가.  내게 있어서 사랑은 한껏 달아올라 제어할 수 없이 사로잡혔다가 비로소 대상에서 벗어났을 때 가장 추악하게 변질되어버리고야 마는 찰나의 상태에 불과했다.  P.82 망각조차도 내게는 일종의 부자유스러운 상황으로 진입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동안 나는 도대체 ㅜ엇을 바라고, 무엇을 기다리고, 무엇을 꿈꾸었던 것일까. ... 그가 나의 가장 뜨거운 조각들을 가져가버렸다는 사실을, 그로 말미암아 내 어떤 부분이 통째로 바뀌어버렸다는 것을 후에야, 아주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P.84 - 박상영, <우럭 한 점 우주의 맛> 그날 언니와 나눈 대화는 오랜 시간 잊고 지냈던 사실을 내게 일깨워주었다. 그러니까, 어떤 이와 주고받는 말들은 아름다운 음악처럼 사람의 감정을 건드리고, 대화를 나누는 존재들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낯선 세계로 인도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P.156 - 백수린, <시간의 궤적> 나는 회의로 가득차 있었고, 어디에서든 자그마한 희망의 불씨라도 발견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희망이란 때때로 멀쩡하던 사람까지 절망에 빠뜨리곤 하지 않나? 아니 오로지 희망만이 인간을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있다. 게다가 희망은 사람을 좀 질리게 하는 면이 있는데, 우리들은 대체로 그런 탐스러워 보이는 어떤 것들 때문에 자주 진이 빠지고 영혼의 바닥을 보게 되고 회한의 수렁에 빠지게 된다. P.237 “우리 매년 여름마다 여기 올까?” 우리가 단 한 번도 이야기해본 적 없는 다음 여름에 대해 이야기할 만큼 현수는 그곳이 마음에 들었던 것

경애의 마음, 김금희

경애의 마음 김금희 / 창비 사랑이 시작하는 과정은 우연하고 유형의 한계가 없고 불가해했는데, 사라지는 과정에서는 정확하고 구체적인 알리바이가 그려지는 것이 슬펐다. 가난과 폭력, 배신과 거짓말, 종교, 정치, 국적의 차이, 집안싸움, 부모 반대, 언니 또는 형의 반대, 동생의 반대, 베프나 은사의 반대 호근 기르는 고양이나 개의 반대, 윤리적 판단 - 불륜, 제삼자의 출현 - 같은 일종의 유형들이 있었다. 그렇게 소멸은 정확하고 슬픈 것이었다. p.35 그러면서도 모든 것이 끝났다고는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마음이 끝나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끝나지 않은 것이 아닌가. 대체 끝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어떻게 실감하고 확신하는지 알 수 없었다. 끝이 만져진다면 모를까. 느끼는 것이고 상상하고 인식하는 것인데 지금 내가 그렇지 않은데 어떻게 끝을 말해. 끝을 말하려면 지금 발밑에서 너풀거리며 나뒹구는 아이스크림 포장이나, 택시의 노란 헤드라이트 불빛같이 눈앞에 지나가는 어떤 것도 아픔을 환기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어야했다. 어떤 풍경도 산주를 떠올리게 하지 않고 지시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는 경애에게는 모든 것이 산주와 관련된 듯 느껴졌다. p.60 전혀 알지도 못하던 사람들이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기 위해서는, 그렇게 안녕하기 위해서는 아주 많은 행운이 작용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태어나야 했고 자라야 했고 먹어야 했고 사고를 피해야 했고 견뎌야 했다. 무엇보다 불운을, 불운이라고 말하면 대체 피할 수 있는 건가 싶은데, 적어도 살아 있다면 피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경애는 알았다. p.62 경애 엄마는 경애가 씻는 것, 머리를 감고 이를 닦고 세수를 하는, 누구나 하루에 한번쯤은 귀찮아도 후다닥 해내는 그런 일마저도 너무 무거운,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남들에게는 자신을 방치하는 일이고 자신에게는 최선인 그런. p.104 미안해, 나는 아무래도 늦을 것 같아.....

박준, 세상 끝 등대 1

세상 끝 등대 1 박준 내가 연안을 좋아하는 것은 오래 품고 있는 속마음을 나에게조차 내어주지 않는 일과 비슷하다 비켜가면서 흘러들어오고 숨으면서 뜨여오던 그날 아침 손끝으로 먼 바다를 짚어가며 잘 보이지도 않는 작은 섬들의 이름을 말해주던 당신이 결국 너머를 너머로 만들었다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시인선 032 = 오래 품고 있는 속마음 비켜가면서 흘러들어오고 숨으면서 뜨여오더니 너머가 되어버린 것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김혼비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김혼비 / 민음사 나를 포함, 대부분의 여자 축구 팬들 머릿속 검색창에 '축구'를 쳤을 때 뜨는 이미지들은 아마 몇 년도 무슨 경기에서 어떤 선수가 터뜨린 역전골이라거나, 응원하는 팀이 우승했던 순간, 좋아하는 선수의 안타까운 부상, 이런 것들일 것이다. 반면 남의 축구는 거의 보지 않는 이 '축구하는 여자들' 머릿속에 뜨는 것들은 본인이 넣었던 첫 골, 본인이 경기 중 저지른 뼈아픈 실책, 우리 팀이 역전승하던 날, 우리 팀 유니폼 같은 것들일 것 같다. 그 속에는 오직 나 자신, 내가 속한 팀만이 있다. 어느 프로 축구팀의 어느 유명 선수가 끼어들 틈 없이. '축구'와 관련해서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자신의 몸에 새겨진 경험들로만 꽉 채워져 있는 여자들. ... 나는 가능한 한 축구의 많은 면을 만나려고 하는데, 그녀들은 오직 자신과 직접 맞닿는 면을 통해서만 축구를 만난다. 그 우직한 집중. p.43 이쪽으로 갈 것처럼 오해하게 만들고는 저쪽으로 도망가고, 이쪽으로 패스하는 척하다 저쪽으로 패스하고, 골대 왼쪽으로 차는 척하다가 오른쪽으로 차서 골인시키는, 누군가의 오해를 이용해서 원하는 것을 얻는 게임.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오해 유발'이야말로 아웃사이드 드리블의 사명인 것이다. ... 피치 위에서도 피치 밖의 세상에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오해를 만들고 오해를 하고 오해를 받고 오해로 억울해하고 힘들어하지만, 그래도 어떤 오해는 나를 한 발 나아가게 한다. p.75 하나의 같은 사건이 사람들에게 가닿을 때는 제각각 다른 모양의 그릇이 된다. 모양 따라 흘러 담기는 마음도 다르고 그걸 세상에 내미는 방식도 다르다. 아무것도 안 담겨서 내밀 게 없는 사람도 있다. p.193 공은 윤자 언니의 발 앞에 떨어졌고 경기는 계속됐다. 누군가가 떠나가도, 그 여파로 잠시 주춤해도, 양발을 여기 이 땅에 딱 붙이고 공을 던지면 멈췄던 축구는 그렇게

박준, 저녁 - 금강

저녁 - 금강 박준 소멸하는 약력은 나도 부러웠다 풀 죽은 슬픔이 여는 길을 알고 있다 그 길을 따라올라가면 은어가 하루처럼 많던 날들이 나온다 저녁 강의 시야(視野)가 그랬다 출발은 하겠는데 계속 돌아왔다 기다리지 않아도 강변에서는 공중에서 죽은 새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땅으로 떨어지지도 않은 새의 영혼들이 해를 등지고 다음 생의 이름을 점쳐보는 저녁 당신의 슬픈 얼굴을 어디에 둘지 몰라 눈빛이 주저앉은 길 위에는 물도 하릴없이 괴어들고 소리 없이 죽을 수는 있어도 소리 없이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우리가 만난 고요를 두려워한다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시인선 032 = 온통 새하얗고 드넓은 눈밭 위로 칠흑같은 어둠이 내려앉은 극지의 밤, 이불 속에 웅크려 이 시를 읽으면서 눈빛이 주저앉은 길이 어떤 건지, 조금 알 것 같아서 마음이 먹먹했었다.

이제니, 후두둑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일 뿐

후두둑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일 뿐 이제니  그래봤자 결국 후두둑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일 뿐. 오늘부터 나는 반성하지 않을 테다. 오늘부터 나는 반성을 반성하지 않을 테다. 그러나 너의 수첩은 얇아질 대로 얇아진 채로 스프링만 튀어오를 태세. 나는 그래요. 쓰지 않고는 반성할 수 없어요. 반성은 우물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너의 습관. 너는 입을 다문다. 너는 지친다. 지칠 만도 하다. 우리의 잘못은 서로의 이름을 대문자로 착각한 것일 뿐. 네가 울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면 나는 둘중의 하나를 선택하겠다고 결심한다. 네가 없어지거나 내가 없어지거나 둘 중의 하나라고. 그러나 너는 등을 보인 채 창문 위에 뜻 모를 글자만 쓴다. 당연히 글자는 보이지 않는다. 가느다란 입김이라도 새어나오는 겨울이라면 의도한 대로 너는 네 존재의 고독을 타인에게 들킬 수도 있었을 텐데. 대체 언제부터 겨울이란 말이냐. 겨울이 오긴 오는 것이냐. 분통을 터뜨리는 척 나는 나지막이 중얼거리고 중얼거린다. 너는 등을 보인 채 여전히 어깨를 들썩인다. 창문 위의 글자는 씌어지는 동시에 지워진다. 안녕 잘 가요. 안녕 잘 가요. 나도 그래요. 우리의 안녕은 이토록 다르거든요. 너는 들썩인다 들썩인다. 어깨를 들썩인다. 헤어질 때 더 다정한 쪽이 덜 사랑한 사람이다. 그 사실을 잘 알기에 나는 더 다정한 척을, 척을, 척을 했다. 더 다정한 척을 세 번도 넘게 했다. 안녕 잘 가요. 안녕 잘 가요. 그 이상은 말할 수 없는 말들일 뿐. 그래봤자 결국 후두둑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일 뿐. <아마도 아프리카> 창비시선 321 창비 = 그저 봄이 오긴 오는 것이라고 믿으며.

대량살상 수학무기, 캐시오닐

대량살상 수학무기 캐시 오닐 지음/ 김정혜 옮김 / 흐름출판 수학 모형은 여러 가지 면에서 신을 닮았다. 신처럼 불투명해서 이해하기 힘들다. 각 영역의 최고 사제들, 즉 수학자와 컴퓨터 과학자들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에게도 내부의 작동 방식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리고 신의 평결처럼, 잘못되거나 유해한 결정을 내릴지라도 반박하거나 수정해달라고 요구할 수 없다. 무엇보다 사회적 약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차별하고 부자는 더욱더 부자로 만들어주는 경향이 있다. 나는 이런 유해한 모형들의 적절한 이름을 생각해보았다. 바로 '대량살상수학무기 Weapons of Math Destruction', 줄여서 WMD다. p.16 그 모든 놀라운 능력에도 불구하고 기계들은 공정성을 제고하기 위해 그 무엇도 조정할 수 없다. 최소한 기계 스스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데이터를 샅샅이 조사하고 무엇이 공정한지 판단하는 것은 기계로선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영역이며 지독히도 복잡한 일이다. 오직 인간만이 시스템에 공정성을 주입할 수 있다. p.259 그런 기계들은 매우 효율적이겠지만 약간 제멋대로며, 절대적인 불가지의 영역으로 남게 될 것이다. 누구도 기계들의 논리를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세상이 올지 모른다. 만약 인간이 통제 수단을 되찾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미래의 WMD는 강력하고 신비로운 존재가 될 것이다. 아니, WMD가 우리를 제멋대로 다루는데도 우리는 그런 사실조차 거의 모른 채 살아갈지 모른다. p.288 데이터 처리 과정은 과거를 코드화할 뿐, 미래를 창조하지 않는다. 미래를 창조하려면 도덕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그런 능력은 오직 인간만이 가지고 있다. 우리는 더 나은 가치를 알고리즘에 명백히 포함시키고, 우리의 윤리적 지표를 따르는 빅데이터 모형을 창조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가끔은 이익보다 공정성을 우선시해야 한다. p.337 = 새 직장에 들어와서 보니까 온통 모르는 세계였다. 나는 작동 원리조차 가늠하기 힘든

심보선, 청춘

청춘 심보선 거울 속 제 얼굴에 위악의 침을 뱉고서 크게 웃었을 때 자랑처럼 산발을 하고 그녀를 앞질러 뛰어갔을 때 분노에 북받쳐 아버지 멱살을 잡았다가 공포에 떨며 바로 놓았을 때 강 건너 모르는 사람들 뚫어지게 노려보며 숱한 결심들을 남발했을 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을 즐겨 제발 욕해달라고 친구에게 빌었을 때 가장 자신 있는 정신의 일부를 떼어내어 완벽한 몸을 빚으려 했을 때 매일 밤 치욕을 우유처럼 벌컥벌컥 들이켜고 잠들면 꿈의 키가 쑥쑥 자랐을 때 그림자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에서 그 그림자들 거느리고 일생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을 때 사랑한다는 것과 완전히 무너진다는 것이 같은 말이었을 때 솔직히 말하자면 아프지 않고 멀쩡한 생을 남몰래 흠모했을 때 그러니까 말하자면 너무너무 살고 싶어서 그냥 콱 죽어버리고 싶었을 때 그때 꽃피는 푸르른 봄이라는 일생에 단 한 번뿐이라는 청춘이라는 <슬픔이 없는 십오 초> 문학과지성 시인선 346 문학과지성사 = 나 여전히 일생에 단 한 번뿐이라는 그 시간을 살아내고 있구나 싶어서, 눈물도 웃음도 났다.

심보선, 식후에 이별하다

식후에 이별하다 심보선 하나의 이야기를 마무리했으니 이제 이별이다 그대여 고요한 풍경이 싫어졌다 아무리 휘저어도 끝내 제자리로 돌아오는 이를테면 수저 자국이 서서히 사라지는 흰죽 같은 것 그런 것들은 도무지 재미가 없다 거리는 식당 메뉴가 펼쳐졌다 접히듯 간결하게 낮밤을 바꾼다 나는 저기 번져오는 어둠 속으로 사라질테니 그대는 남아 있는 환함 쪽으로 등 돌리고 열까지 세라 열까지 세고 뒤돌아보면 나를 집어 삼킨 어둠의 잇몸 그대 유순한 광대뼈에 물컹 만져지리라 착한 그대여 내가 그대 심장을 정확히 겨누어 쏜 총알을 잘 익은 밥알로 잘도 받아먹는 그대여 선한 천성(天性)의 소리가 있다면 그것은 이를테면 내가 죽 한 그릇 뚝딱 비울 때까지 나를 바라보며 그대가 속으로 천천히 열까지 세는 소리 안 들려도 잘 들리는 소리 기어이 들리고야 마는 소리 단단한 이마를 뚫고 맘속의 독한 죽을 휘젓는 소리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먹다 만 흰죽이 밥이 되고 밥은 도로 쌀이 되어 하루하루가 풍년인데 일 년 내내 허기 가시지 않는 이상한 나라에 이상한 기근 같은 것이다 우리의 오랜 기담(奇談)은 이제 여기서 끝이 난다 착한 그대여 착한 그대여 아직도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 열을 셀 때까지 기어이 환한가 천 만 억을 세어도 나의 폐허는 빛나지 않는데 그 질퍽한 어둠의 죽을 게워낼 줄 모르는데 <슬픔이 없는 십오 초> 문학과지성 시인선 346 문학과지성사 = 기어이 환하고야 마는가

데뷔의 순간, 한국영화감독조합

데뷔의 순간  - 영화감독 17인이 들려주는 나의 청춘 분투기 주성철 엮음/ 한국영화감독조합 지음 푸른숲 점점 주변의 불편한 시선도 느껴지고, 이제 할 만큼 했으니 다른 먹고살 일을 찾으라는 진심 어린 조언도 숱하게 들었다. 그럴 때 가장 치명적인 것은 자신에게 재능이 없다는 자학과 스스로를 가엽게 여기는 자기연민의 도돌이표다. ... 그럼에도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내가 진정으로 원한 데뷔작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김경형'이라고 하는 인간의 본질과 무관한 불량식품은 만들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p.26-27, 31 김경형,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정면승부다> 그리고 특별한 재능이나 영리함이 있었다기보다 맷순간 가졌던 절박함이 나의 무기였다. 그래서 나는 동생 승범이나 박찬욱 감독님처럼 '아님 말고' 식의 여유를 가진 사람들이 부럽다. 물론 그 역시 진짜 여유라기보다 자기 자신만 아는 절박함의 다른 표현이겠지만, 나는 그런 생각을 뱉어낼 여유조차 없다. 지금도 한 편, 한 편 만들 때마다 전쟁 같고 너무 많은 상처가 남으며 항상 불안하다. 내겐 너무 생명 같고 소중한 영화라 그 영화의 운명을 지나치게 걱정하는 것이다. ... 어쩌면 내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바로 그 절박함 때문이었다. ...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결코 많지 않다. 그러면서 겁먹지 않는 태도를 키워야 한다. 챔피언은 잘 때리는 사람이 아니라 잘 맞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p.82-83 류승완, <챔피언은 잘 대리는 사람이 아니라 잘 맞는 사람이다> '진짜 이 길이 내 길인가' 하는 불확실성과 마주하면서 버틸 수 있었던 힘은 '이것밖에 없다'는 생각이었다. 할 줄 아는 다른 게 없으니 '선택의 여지'니 그런 게 없었다. ... 그렇게 오직 영화로 먹고살기로 결심한 이상, 머나먼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는 하나다. 자기가 뭔가 대단한 일이라

호모데우스, 유발 하라리

호모데우스 유발 하라리 지음/ 김명주 옮김/ 김영사 이렇듯 문자는 강한 허구적 실체의 출현을 도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조직하고 강, 습지, 악어의 실재를 재편하였다. 이와 동시에 문자는 사람들이 이런 허구적 실체의 존재를 더욱 쉽게 믿도록 만들었다. p. 228 역사에는 단 하나의 내러티브가 아니라, 수천 개의 내러티브가 존재한다. 그중 하나를 선택할 때 우리는 나머지 내러티브들을 침묵시키는 선택을 하는 것이기도 하다. p. 245-246 허구는 꼭 필요하다. 돈, 국가, 기업 같은 허구적 실체에 대한 널리 통용되는 이야기가 없다면 복잡한 인간사회가 제대로 돌아갈 수 없다. ... 하지만 이야기는 단지 도구일 뿐이다. 이야기가 목표나 잣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단지 허구임을 잊을 때 우리는 실제에 대한 감각을 잃게 되며, 그때 우리는 '기업을 위해 많은 돈을 벌려고' 또는 '국익을 보호하려고' 전쟁을 시작한다. p. 247 하지만 사실 근대는 놀랍도록 간단한 계약이다. 계약 전체를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을 정도이다. 즉 인간은 힘을 가지는 대가로 의미를 포기하는 데 동의한다는 것이다. p. 277 우리를 구속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무지뿐이다. p. 279 자본주의교가 성장이라는 지고의 가치에 대한 믿음에서 연역해낸 최고의 계명은 '너희는 너희의 수익을 성장시키기 위해 투자해야 한다'이다. p. 291 과학의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지를 발견한 것이었다. 세상에 대해 아는 것이 얼마나 없는지 깨달았을 때 비로소 인간에게 새 지식을 찾아나설 매우 타당한 이유가 생겼고, 이것은 진보를 향해 가는 과학의 길을 열었다. p. 295 인본주의에 따르면, 인간은 내적 경험에서 인생의 의미 뿐 아니라 우주 전체의 의미를 끌어내야 한다. 무의미한 세계를 위해 의미를 창조해라. 이것이 인본주의가 우리에게 내린 제1계명이다. 그러므로 근대의 핵심인 종교혁명은 신에 대한 믿음을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김영민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김영민 / 어크로스 삶이 곧 죽음이라면, 그리하여 이미 죽어 있다면, 여생은 그저 덤이다. 그리하여 나는 어려운 시절이 오면, 어느 한적한 곳에 가서 문을 닫아걸고 죽음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불안하던 삶이 오히려 견고해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도 삶의 기반이 되어주는 것은 바로 그 감각이다. 생활에서는 멀어지지만 어쩌면 생에서 가장 견고하고 안정된 시간. 삶으로부터 상처받을 때 그 시간을 생각하고 스스로에게 말을 건넨다. 나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버티고 살아갈 수 있다고. p.7-8 요컨대, 상대를 따듯하게 대해주는 일상적인 습관이 중요합니다. 지금 이 순간 두 사람의 감정이 아무리 뜨거워도, 그 애정이 이 따뜻함의 습관을 만들어주지는 않을 겁니다. 그보다는 거꾸로, 일상적으로 따뜻함을 실천하는 습관이 길게 보아 두 사람 간의 애정을 만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p.47-48 쉰다는 것이 긴장의 이완을 동반하는 것이라면, 오직 제대로 긴장해본 사람만이 진정한 이완을 누릴 수 있다. 당겨진 활시위만이 이완될 수 있다. p.87 "어느 소설가가 그랬다잖아요. '왜 책을 읽어야 하냐고 묻는다면, 남이 침범할 수 없는 내면을 갖기 위해서라고 생각해요'라고. 제 농담은 그 말에 대한 각주 아닐까요? 그언론인의 내면에 깃든 시란, 설익은 국가가 폭력을 휘두른다고 파괴할 수 있는 게 아니죠." p.107 소멸에는 어떤 예외도 없다. 어떤 존재를 지탱했던 조건이 사라지면 그 존재도 사라진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소멸의 여부가 아니라 소멸의 방식이다. p.125 파국을 넘어, 사회적 삶은 의외로 오래 지속된다. 사회적 삶이 지속되는 동안은 공적인 의미를 확정할 수 없기에 역사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역사는 사회에 대해 죽음이 삶에 행하는 것과 같은 역할을 한다. p.137 실로 사람들은 과거에 존재했던 것만 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