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그는 첫 수업 시간에 엄숙한 표정으로 이런 말을 해서 나를 웃겼다.
"시인은 숙련된 킬러처럼 언어를 포착하고 그것을 끝내 살해하는 존재입니다."

p.8
 금강경을 읽는다.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일으킬지니라."
p.9



강사는 내 시어가 참신하다고 했다. 날것의 언어와 죽음의 상상력으로 생의 무상함을 예리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했다. 그는 거덥하여 내 '메타포'를 고평했다.
"메타포라는 게 뭐요?"
강사는 씩 웃더니 - 그 웃음, 마음에 안 들었다 - 메타포에 대해 설명했다. 듣고 보니 메타포는 비유였다.

아하.

미안하지만 그것들은 비유가 아니었네, 이 사람아.

p.11



"쓰인 모든 글들 가운데서 나는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피로 써라. 그러면 너는 피가 곧 정신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리라. 타인의 피를 이해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책 읽는 게으름뱅이들을 증오한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말이다.
p.31-32
요즘 시인들 시는 잘 모르겠다. 너무 어렵다. 그래도 이런 구절은 좋다. 적어둔다.
"내 고통은 자막이 없다 읽히지 않는다_김경주, '비정성시非情聖市'"
같은 시 중에서 또 한 구절.
"내가 살았던 시간은 아무도 맛본 적 없는 밀주密酒였다/나는 그 시간의 이름으로 쉽게 취했다."

p.36  

프랜시스 톰프슨이라는 자가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모두 타인의 고통 속에서 태어나 자신의 고통 속에서 죽어간다."  나를 낳은 어머니, 당신 아들이 곧 죽어요.

p.48
 "우연히요. 정말 우연히요."
은희가 말했다.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쓰는 '우연히'라는 말을 믿지 않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다.

p.63 


 사람들은 악을 이해하고 싶어한다. 부질없는 바람. 악은 무지개 같은 것이다. 다가간 만큼 저만치 물러나있다. 이해할 수 없으니 악이지.

p.115
공空 속으로 미풍이 불어온다. 나는 거기에서 한없이 헤엄을 친다. 아무리 헤엄을 쳐도 이곳을 벗어날 수가 없다. 소리도 진동도 없는 이 세계가 점점 작아진다. 한없이 작아진다. 그리하여 하나의 점이 된다. 우주의 먼지가 된다. 아니, 그것조차 사라진다.

p.148-149


-
엄청난 흡입력이다.
마지막 순간에 느끼는 당혹스러운 쾌감이란.



정적이 일시에 찾아왔다.

(2013/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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