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목, 칼끝에 혀끝을 대보는 순간

칼끝에 혀끝을 대보는 순간,



개수대에 물이 사라지고
크르르륵 물소리가 수만 가닥 혈관을 타고 공중의 피부 속으로 스며들고
손잡이가 부러진 칼처럼, 문득

거꾸로 떨어지는 형광등빛-갈비뼈를 밟고 지나가는 시간의 하얀 발바닥,
이중새시 너머 상가 불빛이
껌을 씹는다

그리고 우리는 이곳에 담겨 있다고 믿는다 쏟아지지 않고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잠시 구정물에 뜬 얼굴로
출렁이다 크르르륵,

소용돌이 아래부터 빠져나갈 몸은 한 바가지 몸, 사는 것의 불빛 속에 잘못 고일 때
도마의 칼자국처럼 새겨지는
정적 속으로 문자가 온다 낙엽은

자살인가요 타살인가요-누구도 답해주지 않는 함구의 현장으로 강도처럼
손잡이가 부서진 칼처럼, 문득
떨어지는 붉은 혓바닥

보십시오 고요가 순간을 찌르고 있습니다

이곳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살해를 한다,
개수대에 물이 사라질 때
먼빛이 가까운 빛에 섞이고 난도당한 순간이 제 시신을 공중에 흩어놓을 때



-

어제 다섯시, 캡과의 아이디어 회의를 위해 시경뜨락을 찾았다. 좀이 쑤시던 까닭에 조금 일찍 도착했고 '화제의 문학'이란 스티커를 달고 책장 한켠에 다소곳이 놓여 있던 신용목 시인의 시집을 펼쳤다. 우연처럼 운명처럼 읽은 게 바로 이 시였는데 공교롭게도 나의 요즘과 맞아떨어지는 시어들이 가득했다.

예를 들어,

자살인가요, 타살인가요, 누구도 답해주지 않는 함구의 현장, 강도처럼, 문득 떨어지는 붉은 혓바닥, 고요가 순간을 찌르고 있습니다..............

매일 내가 분투하는 현장의 언어들이다. 신기하게도 이 시를 읽고 돌아와 구로경찰서에서 자살 사건을 인지했고, 아니나 다를까 나는 함구의 현장 속을 이리저리 뛰어다녀야 했다.

한편으로는 이 정교한 시어들의 세계를 비루한 일상속으로 끼워맞춰 단편적으로 공감하고 있는 나 자신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아무튼, 이렇게 또 하루가 간다. 배가 고픈데 선배는 아직 밥 먹으란 지시를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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