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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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쏘다니는 것이나
지칠 줄 모르고 머뭇거리는 것.
이런 말들의 만남이 주는 오묘한 기분. 지난 겨울엔 기형도 시집을 마르고 닳도록 읽었다. 시어 하나하나를 곱씹으면서 읽었다. 시작과 끝이 맞닿은 계절엔 평소보다 조금 많은 감정을 떠안고 마음속을 헤매이곤 했다. 그 겨울엔 기형도였다. 아, 기형도와 이육사였다.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이 네 행이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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