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테의 수기, 라이너 마리아 릴케
나는 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 왜 그런지 모르겠으나, 모든 게 지금까지보다 더 내면 깊숙이 파고들어 과거에는 항상 끝났던 곳에 이제 머물러 있지 않는다. 옛날에는 알지 못했던 깊은 내면이 생겼다. 이제 모든 게 그곳으로 간다. 거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나는 모르겠다.
p.11-12
저 작은 달이 못하는 짓이 없다. 달 주변에서 모든 게 밝고 가볍고, 밝은 공기 속에서 은근하면서도 뚜렷이 보이는 그런 날들이 있다. 바로 가까이 있는 것도 먼 곳의 음향을 갖고, 멀리 물러나 다만 보여질 뿐 다다르지는 못한다.
p. 25
시를 쓰기 위해서는 때가 오기까지 기다려야 하고 한평생, 되도록이면 오랫동안, 의미(意味 )와 감미(甘味)를 모아야 한다. 그러면 아주 마지막에 열 줄의 성공한 시행을 쓸 수 있을 거다. 시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감정이 아니고(사실 감정은 일찍부터 가질 수 있는 거다),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추억이 있다는 것만으로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 추억이 많으면 그것을 잊을 수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추억이 다시 살아날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큰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추억 그 자체만으로는 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추억이 우리들의 몸속에서 피가 되고, 시선과 몸짓이 되고, 이름도 없이 우리들 자신과 구벽되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몹시 드문 시간에 시의 첫마디가 그 추억 가운데에서 머리를 들고 일어서 나오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p. 26-28
이 모든 일이 있을 수 있는 일이라면, 있을 수 있는 일 같기만 하더라도 무엇인가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면, 그저 가능한 것 같기만 하더라도 이 세상의 모든 것들에게 무슨 일이든지 일어나야 하리라. 이런 불안한 생각을 가졌던 사람은 아무라도, 하지 못한 일 중에서 무엇인가를 조금이라도 하기 시작해야 한다. 아무라도 좋다. 전혀 적임자가 아니라도 좋다. 이 젊고 보잘것없는 외국인 브리게는 6층 방에 앉아서 낮이나 밤이나 글을 써야만 할 것이다. 그래, 그는 써야만 한다. 그것이 그의 종말이 되기도 할 것이다.
p. 32
그리하여 너의 내부에는 공간이 거의 없어지고 이런 좁은 데서는 네 안에 아주 커다란 것이 머무를 수 없게 된다는 게 너를 매우 안심시킨다. 어떤 엄청난 것도 네 속에 들어 있어야 한다는 것과 그런 환경에 맞추어 작아져야 한다는 것이 또한 너를 안심시킨다. 그러나 너의 밖은 끝이 없다. 만일 밖에서 두려움이 커지면, 네 속에도 들어오게 되고 채워진다.
거기에서는 두려움이 높이 솟아올라 너보다 높아지고 네가 마지막 피난처인 듯이 도망쳐 간 너의 호흡보다도 더 높아진다. 아, 그럼 어디로 가나, 어디로 가야 하나? 너의 심장은 너를 네 속에서 몰아내고는 네 뒤를 쫓고, 그러면 너는 거의 너의 밖에 나와 있어 너의 속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게 된다.
p. 85-86
내 희망은 언제나 창이었다. 나는 창밖에는 지금도 혹은 갑자기 비참하게 죽어가는 순간에도 내게 위로가 되어줄 어떤 것이 있으리라는 공상을 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을 거의 보지는 못했기에, 차라리 창이 벽처럼 막혀 있기를 바랐다. 창밖에는 언제나 똑같이 무관심한 밤이 계속되고 있고, 또한 나의 고독 외에는 어떤 것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 알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자초한 고독, 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진 고독이 밖에도 있었다. 문득 옛날에 헤어졌던 사람들이 떠오르고 왜 그 사람들과 헤어지려 했는지 알 수 없었다.
p. 187-188
억제할 수 없이 많은 작은 움직임들이 모여 가장 확실한 생명의 모자이크가 만들어진다. 사물들은 서로 이리저리 공중에서 흔들리고 있고 그 서늘함이 그림자를 뚜렷하게, 태양을 가볍고 맑은 광채로 만든다.
p. 227
생명은 우리에게 맞지 않는 크기를 지닌 몇 가지밖에 우리에게서 얻지 못한다. 성자는 운명을 거부하면서 신을 대하며 이 위대한 것을 선택한다. 그러나 여자는 보낼부터 남자와의 관계에서 이와 똑같은 선택을 해야 하기 때문에 모든 애정 관계는 불행을 초래한다. 여자는 항상 변모되어 가는 남자 곁에서 운명도 모르고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처럼 단호하게 서 있다. 삶은 운명보다 더 위대하기에 사랑하는 여자는 언제나 사랑받는 남자보다 더 우월하다.
p. 232
신을 별로 가지지 못한 것처럼 우리는 극장다운 극장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런 걸 갖자면 결속이 필요하다. 각자 자기만의 공상과 불안을 가지고 있다가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든가 적합하다고 여겨질 때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 함께 느끼는 고뇌의 벽을 향해 고함지르는 대신에 우리의 이성이 풍부하게 유지되도록 계속해서 그것을 희석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 벽 뒤에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이 응결되고 긴장되고 있다.
p. 260-261
사랑받는 것은 불타오르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은 고갈되지 않는 기름으로 불을 밝히는 것이다. 사랑받는 것은 사라져가는 것이고, 사랑하는 것은 지속적인 것이다.
p. 280
그는 사랑의 대상을 그의 감정의 빛 안에서 소진시키는 대신에 그 빛으로 남김없이 비춰주는 것을 서서히 배웠다. 그리하여 점점 더 투명해진 애인의 모습으로 인하여 그의 무한한 소유욕에 넓은 전망이 트이는 것을 느꼈고, 그로 인한 황홀감에 익숙해졌다.
그리고 그는 자신도 그렇게 환히 비춰지기를 간절히 바란 나머지 얼마나 밤새도록 눈물을 흘렸던가. 그러나 사랑받는 여인은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 아직 사랑하는 여인이 되지 못한다. 아, 밀물처럼 밀려오는 사랑의 선물을 몹시 허무하게 느껴 낱낱이 되돌려받은 쓸쓸한 밤이여.
p. 284
그는 아무 뜻도 없는 짤막한 허위의 첫 문장을 쓰기까지 일생이 걸린다는 것을 처음에는 믿지 않으려 했다.
이제 그가 몹시 애를 써서 고통스럽게 사랑하는 법을 배웠을 때, 지금까지 그가 이루어왔다고 생각한 사랑이 모두 얼마나 부족하고 미미하였는지 드러났다. 그것은 무에서는 아무것도 이루어질 수 없는 것과 같았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일을 하기를, 사랑을 실현하기를 시작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p. 287
번역이 탁월하진 않았던 것 같다.
생각거리가 쌓여간다.
어떻게든 나 역시 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
(2013/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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