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옆 동물원 (1998)







"사랑이란 게 처음부터 풍덩 빠지는 것인 줄로만 알았지, 이렇게 서서히 물들어 버리는 것인 줄은 물랐어."

"요즘 사람들 사랑은 같은 음악을 듣더라도 각자 이어폰을 끼고 듣는 꼴 같아. 조금은 이기적이고 또 조금은 개인적이고 왠지 뭔가 자기가 갖고 있는 걸 다 내주지 않는..."

"난 정말 달인가 보다. 내 안에서는 노을이 지지도 않으며, 그에게 미치는 내 중력은 너무도 약해 그를 당길 수도 없다."

"멀리 있는 별들은 더 빨리 멀어져서 절대로 따라잡을 순 없다지. 그는 그 별들처럼 더욱더 멀어지고 난 결코 그에게 다가갈 수 없겠지. 그와 나 사이엔 수억 년의 차이가 있다. "

"평균 수명이 길어졌으니까 그만큼 철도 늦게 드는 거야."

"별은 언제나 과거의 빛이다. 저 별의 현재는 이미 먼 미래가 되어버렸다. 현재를 아주 보잘것 없이 만드는 그 막대함이 마음에 든다."

"해보고 나서 후회하는 게 시작도 안하고 아쉬워하는 것 보다 나아. 후회보다 미련이 훨씬 오래가는 법이거든."


오래된 멜로 영화는 촌스럽지 않다. 멜로라는 장르의 본질은 시대가 흐른대도 크게 변할 것 없는 그 무엇이기 때문일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에서나 오늘날 수목드라마에서나 98년에 개봉한 영화나 2018년에 개봉할 영화. 이들의 대사 한 줄에서 내 감정을 단련할만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건 줄리엣도, 춘희도, 태공실도, 나도 모두가 같은 감정을 앓는 까닭이다.

누군가에게 물들어간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자신을 되찾기까지는 그보다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동안 눈먼 감정의 바다를 한없이 헤맸다. 한 발짝 떨어져 내 어린 감정을 돌아볼 때, 나는 부끄럽지 않은가? 미안해야 하는지, 고마워야 하는지, 미워야 하는지, 정다워야 하는지, 그리워야 하는지. 복잡하다. 확실한 건 사랑한다는 거다.

그래서 아마도 삼일을 꼬박 앓았다. 이렇게 아픈 것도 오랜만이다. 몸보다 마음이 더 아픈 내가 한심하다. 이 이야기의 결말은 어떻게 될까.
나는 그의 동물원을 헤매다가, 그는 나의 미술관을 떠돌다가, 우리 그렇게 가운데서 만날 수 있을까. 내 감정은 여전해 작별 준비를 할 수도 없다. 지난 일주일이 꿈이었으면 좋겠다.

아래는 영화 속 춘희가 읊던 시.



사랑, 김용택

당신과 헤어지고 보낸
지난 몇 개월은
어디다 마음 둘 데 없어
몹시 괴로운 날들이었습니다

현실에서 가능할 수 있는 것들을
현실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우리 두 마음이 
답답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당신의 입장으로 돌아가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잊을 것은 잊어야겠지요
그래도 마음속의 아픔음
어찌하지 못합니다

계절이 옮겨가고 있듯이
제 마음도 어디론가 옮겨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추운 겨울의 끝에서 희망의 파란 봄이
우리 몰래 우리 세상에 오듯이
우리들의 보리들이 새파래지고
어디선가 또
새 풀들이 돋겠지요

이제 생각해 보면
당신도 이 세상의 하고 많은 사람들 중의 한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을 잊으려 노력한
지난 몇개월 동안
아픔은 컸으나
세상이 더 넓어져
세상만사가 다 보이고
사람들의 몸짓 하나하나가 다 이뻐보이고
소중하게 다가오며
내가 많이도 
세상을 살아낸
어른이 된 것 같습니다

당신과 만남으로 하여
세상에 벌어지는 일들이
모두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고맙게 배웠습니다

당신의 마음을 애틋이 사랑하듯
사람 사는 세상을 사랑합니다

길가에 풀꽃 하나만 봐도
당신으로 이어지던 날들과
당신의 어깨에 내 머리를 얹은 어느 날
잔잔한 바다로 지는 해와 함께
우리 둘인 참 좋았습니다

이 봄은 따로따로 봄이겠지요
그러나 다 내 조국 산천의 아픈 한 봄입니다
행복하시길 빕니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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