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나는 당신이 달다, 변종모

갑자기 허전했다. 상관없는 사람과 길 위에서 보낸 시간들은 늘 허전했다. 길 위에서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면서도 절대로 면역되지 않는다. 우리들은 그 면역되지 않는 마음을 다스리려 길 위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사람들인지 모른다.

그날, 베나울림에서 우리가 나눠먹었던 골뱅이 조갯국처럼 우리는 각자 둥글게 잘 살고 있는 것이거나 잘 견디고 있는 중이라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무엇도 되려 하지 말았어야 했는지 모른다. 결국, 잠시 살다 가는 세상에서 영원하고자 하는 마음쯤은 길 위에 버려도 상관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잘 먹고 잘 사는 일만 우리에게 남은 것인지도 모른다.

p.35


삶이란 문득 이렇게 경건한 것이다. 버릇처럼 다가오는 하루하루를 기꺼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아내는 것. 때로 외롭고 지루하거나 힘든 모든 것들은 스스로 이겨낸 뜨거운 마음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내가 만난 한 가닥 한 가닥의 아름다운 마음을 생각하며 하루하루 걷는 일이 가까운 미래에 큰 포만감을 줄 것이다.
팔미라에서 처음 올리브 나무를 발견했을 때, 나는 그때부터 그 작고 푸른 열매가 좋았다. 이유 없이 좋았다. 그렇게 이유 없이 좋아하다 보면 끝내 이유가 생기는 것이다. 왜 사랑하느냐고 묻지 마시라. 그냥 사랑하고 그냥 좋아하는 그 마음이 가장 순수한 것을. 그것을 의심하지 마시라.

p.99


너는 내게 특별했으므로 오로지 내 가슴만 와인처럼 출렁거렸다. 너는 단지 한 잔의 술을 권했을 뿐인데 나는 그것을 한 공기의 따듯한 밥처럼 여겨 착한 마음으로 받았고, 너는 단지 이 밤이 좋다고 말했는데 나는 함께여서 좋았다. 한 사람씩 빈 병처럼 쓰러져 각자의 방으로 돌아간 텅 빈 주방은 우주처럼 넓었지만, 그중에 가장 밝은 별로 빛나던 너 때문에 나는 그 공허한 공간이 좋았다.

p.111-112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할지라도
내게는 전부인 그날들.
낯선 길 위에서
쓰디쓴 시간을 함께해준
그날의 모든 것들을 생각하면
.
.
.
그래도 나는 당신이 달다.




------------------------

몇 년 전, 우연히 들어간 블로그의 사진과 글이 좋아서, 그 사람의 발자취가 좋아서 내 블로그보다도 더 자주 들어가곤 했었다. 일년도 더 지나고 나서야 블로그 주인이 여행에세이 작가란 걸 알게 됐다.
그리고 또 일년이 지난 뒤에야 마침내 그 사람의 책을 읽었다.

제목도 표지도 참 탐스러웠다. 이 책이 광화문 교보문고 3월의 주목해야 할(?주목할만한?) 신간 코너에 있지 않았더라면 그 사람의 책을 만나는 덴 시일이 더 걸렸을지도 모른다.

그자리에서 순식간에 읽어내려간 책. 바닥에 주저앉아 책을 읽어내려가는 동안 마음 한 켠에 짓눌러놓은 여행에 대한 욕구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책에 흐르는 헤어짐의 언어들, 이별의 감성들이 먹먹하게 심장을 파고들었다. 나는 분명 남자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말이다.

지난 가을에도 그런 적이 있었다. 그땐 이병률의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를 읽고 있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너무나 서글퍼졌다. 바닥까지 가라앉는 알 수 없는 기분.



나는 당시 만나던 남자친구를 주려고 그 책을 한권, 내가 읽기 위해 같은 작가의 다른 책을 한권 사서 집으로 돌아왔고 다음날 그 애랑 헤어졌다. 책은 그 애한테 준 나의 마지막 선물이 됐다.
나는 우리가 왜 헤어졌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도 미묘한 이별이지만 헤어지길 잘 했단 생각은 든다.


(2013/03/31)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해피투게더 (1997)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와타나베 이타루

인턴 (2015)

2015년 11월 4일 수요일 10개 일간지 1면

사람, 장소, 환대, 김현경